[Opinion] 삶을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 [도서]

시 소개 1. 할머니의 소녀시절에 대한 이야기
글 입력 2020.09.0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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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태어난 날이 서로 같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려가며, 그 애의 이마에 입맞춤할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단지 두개골과 안와,

그리고 뼈들만 동일할 뿐.

 

그 애의 눈은 아마도 좀더 클 테고,

속눈썹은 더욱 길 테고, 키도 좀더 크겠지.

 

육체는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로

견고하게 싸여 있겠지.

 

친척들과 지인들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건 분명하지만,

그 애의 세상에서는 거의 모두들 살아 있겠지,

내가 사는 곳에서는

함께 지내온 무리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

 

우린 이토록 서로 다른 존재,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

대신 뭔가 더 가치 있는 걸 알고 있는 양 당당하게 군다.

나는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 애가 내게 시를 보여준다.

이미 오랜 세월 내가 사용하지 않던

꽤나 정성스럽고, 또렷한 글씨체로 쓰인 시를.

 

나는 그 시들을 읽고, 또 읽는다.

흠, 이 작품은 제법인걸,

조금만 압축하고,

몇 군데만 손보면 되겠네.

나머지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

 

우리의 대화가 자꾸만 끊긴다.

그 애의 초라한 손목시계 위에서

시간은 여전히 싸구려인 데다 불안정하다.

내 시간은 훨씬 값비싸고, 정확한 데 반해.

 

작별의 인사도 없는 짧은 미소,

아무런 감흥도 없다.

 

그러다 마침내 그 애가 사라지던 순간,

서두르다 그만 목도리를 두고 갔다.

 

천연 모직에다

줄무늬 패턴,

그 애를 위해

우리 엄마가 코바늘로 뜬 목도리.

 

그걸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 십대 소녀, 쉼보르스카

 

 

131.jpg

 

 

위 시는 쉼보르스카의 유고 시인 '십대 소녀'이다. 할머니가 된 쉼보르스카의 특유의 까칠함과 더불어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태도는 유고 시집인 '충분하다'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좀 더 말해보고자 한다. 화자는 노년에 이르러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떠나보낸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겪은 수많은 일들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 즉,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의 과정을 '간직하고 있다'.

 

수많은 일들을 겪기 전의 십대 소녀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특유의 까칠함이 보이지만, 오히려 그 까칠함을 이용해 자신의 삶에 대한 간직, 특히 마지막 연의 내용과의 괴리를 만들어낸다. 까칠한 화자가 잊어버린 사랑스러운 공통점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면서 화자의 마음에 쿵 하는 느낌의 감동을 준다.

 

화자는 빨간 목도리를 보면서 펑펑 울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그리움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스며들듯이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려 마치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늙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슬픈 운명이다. 그래서 화자는 시에서 언급한 수많은 사실적인 차이점 때문이 아닌,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 자신과 그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자신만큼은 모르는 자신이 다르다는 생각으로 십대 소녀를 밀어 낸 것 같다. 빨간 목도리라는 이미지를 목격한 화자는 우는 대신 다만 그것을 멍 하니 바라보았을 것 같다.

 

그것이 까칠함에 대한 대가이다.

 

까칠한 화자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십대 소녀를 만난 이유에도 일종의 그리움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을까. 나도 나이가 들고 할머니가 되면 쉼보르스카처럼 수많은 그리움들을 간직하고 살게 될까. 솔직한 할머니의 마음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성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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