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사는 사람들] 만약 피카소에게 이 사람이 없었다면

#18 칸바일러와 피카소
글 입력 2020.09.0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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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캔버스에 점 하나만 찍어도 수천억 원에 팔릴 것이다”

 

비합리적으로 보일만큼 천문학적인 그림값에 대해 비판하거나 조롱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의 속뜻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작품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린다는 것이다. 앤디 워홀이 남겼다고 알려진 어록(그러나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인 “일단 유명해져라, 그럼 당신이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것이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에는 어폐가 있다. 유명한 작가일수록 작품 가격이 그만큼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며, 경매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이해하기 힘든 가격에 작품이 낙찰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의 내재적인 완성도 그 자체만으로 작품가를 책정할 수도, 또 그럴 이유도 없다. 작품의 가치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요소와 상황을 고려하여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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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1955년

 

 

2015년에 열린 경매에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이 한화 약 2천억 원에 낙찰되었다(물론 점 하나만 찍힌 그림은 아니다). 지금은 기록이 경신되었지만 당시 전세계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다. 긴 생애 동안 여러 화풍을 넘나들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긴 유럽 근대미술사의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높은 작품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이 이야기를 꼭 덧붙여야겠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작품의 가능성을 일찍이 알아본 화상(art dealer)들을 여럿 만난 굉장한 행운아이기도 했다.

 

 

 

풋내기 화상 칸바일러가 피카소를 처음 만난 날


 

20세기 초 프랑스는 미술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기존의 모든 미술적 관습으로부터 하나씩 벗어나려는 ‘모던 아트’의 태동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고 충격적이고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색해하고 폄하했던 이들의 작품을 한 눈에 알아보고 후원했던 화상들도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인상파 화가들을 처음으로 알아본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부터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6-1939),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 1881-1959), 그리고 다니엘-앙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1884-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볼라르는 젊은 화가 피카소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와 오랜 인연을 맺었던 화상이고, 로젠버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피카소를 범접할 수 없는 ‘천재 화가’의 반열에 올리는 데에 일조한 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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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칸바일러.


 

그리고 칸바일러는 피카소가 구사한 여러 화풍 중 빼놓을 수 없는 ‘입체주의(큐비즘)’ 화파를 이끌고 그들을 지원했던 화상이다. 그가 자신이 차린 화랑에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들고 들어온 피카소를 처음 만났을 때, 칸바일러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피카소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칸바일러와 피카소의 이야기를 담은 여러 저서에서 그 당시 칸바일러가 받은 충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에 굉장한 충격을 받고, 동시에 이것이 아주 ‘새롭고’ 또 ‘중요한’ 작품임을 알아차렸다. ‘새롭고 중요하다는 것’은 그가 예술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의 핵심 포인트였다. 그는 그 다음날 당장 피카소의 스튜디오에 가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하기 위해 사전 연구한 페인팅 몇 점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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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출처: MoMA

 

 

칸바일러가 <아비뇽의 처녀들> 대신 그 작품의 예비작밖에 구입하지 못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 그가 갓 화랑을 오픈한 스물셋 풋내기 화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계 독일인이자 주식중개인이었던 아버지의 사업을 따라 파리에 왔다가 미술과 사랑에 빠져 매일같이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었다. 결국 증권 일을 하길 바랐던 가족의 기대와 달리 1907년 봄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화랑을 차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난 것이었다. 칸바일러의 전기에 따르면 당시 피카소도 <아비뇽의 처녀들>을 팔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칸바일러도 그 작품을 살만 한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진정으로 감탄하는 칸바일러에 감동한 피카소는 그 후에도 그와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칸바일러의 황금기와 암흑기


 

피카소를 만난 이듬해에 칸바일러 갤러리에 스물 여섯 청년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가 찾아왔다.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 전시에 여섯 점의 작품을 출품했다가 거절당하고 젊은 화상 칸바일러에게 작품을 들고 찾아온 것이었다. 칸바일러가 이번에도 재목을 알아본 것일까? 그는 살롱 도톤느 전시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화랑에서 브라크의 단독 전시를 열었다. 그 전시를 보러온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이라는 평론가는 브라크가 “공간이건 사람이건 집이건 뭐든 기하학적인 패턴, 입방체(큐브)로 환원해버린다”고 평했다. 그게 ‘입체파(큐비즘)’라는 칭호의 시초가 되었고, 입체파 화가들에게 미술사와 미술시장의 한 자리를 내어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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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그림 앞에 앉은 칸바일러, 1962년. 사진: Brassaï 출처: Gagosian Gallery.

 

 

칸바일러는 브라크에게 피카소를 소개시켜주었다.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짧지만 후대에 강렬한 영향을 미친 입체화파를 이끌어나갔다. 브라크와 피카소 외에 이 화상은 후안 그리스(Juan Gris),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등을 발굴했다. 그는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이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하고 그들을 홍보, 지원했으며, 1920년에는 저서 <입체주의의 부상(The Rise of Cubism)>을 발간하여 이론적 토대를 쌓았다.

 

그의 사업가적 기질과 안목이 돋보였던 부분은 바로 ‘전속 작가’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칸바일러는 앞서 언급한 화가들과 독점 계약을 맺었다. 이는 화상이 전속 작가의 작품을 판매하고 홍보할 권리를 독점적으로 가지는 대신 작가는 돈 걱정 없이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칸바일러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작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컬렉터들과 화상들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전속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 시기는 입체파 화가들과 칸바일러 모두에게 빛나는 황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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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다니엘-앙리 칸바일러>, 1910년. 출처: 시카고미술관

 

 

칸바일러의 암흑기는 전쟁과 함께 찾아왔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인이었던 그는 적국 프랑스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이 무렵 칸바일러는 전속 계약을 맺고 있던 작가들이 더 나은 조건으로 다른 화상과 계약을 할 수 있도록 보내주었다. 대부분이 떠나고 후안 그리스만 남았다고 한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작품들을 ‘적국의 자산’으로 규정하고 몰수했다. 그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할 정도로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스위스로 피난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준 일이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칸바일러에게서 압수한 1200여 점의 작품을 전리품 경매에 부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친지들의 이름을 빌리면서까지 자신의 작품을 다시 회수하려 애썼지만, 결국은 대부분의 작품들이 여기저기로 팔려나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전쟁 전까지 칸바일러의 전속 작가들을 무시하던 화상들이 경매에 찾아와 저렴한 가격에 작품을 대량으로 쓸어가는 일도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브라크가 너무 화가 나 한 화상을 때려눕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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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와 다니엘-앙리 칸바일러, 1957년. 사진: Franz Hubmann 출처: artnet

 

 

이 당시 피카소는 칸바일러에게 냉정하게 대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카소에게 돈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한 칸바일러를 떠나 다른 화상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 화상이 파리에서 뉴욕을 오가며 피카소를 홍보하고, 뉴욕 현대미술관에 그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도록 연결해주면서 1930년대에 피카소를 정점에 위치시킨 폴 로젠버그였다. 피카소는 자신감과 발빠른 현실 대처 능력으로 스스로 기회를 찾아나선 것이지만, 당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칸바일러에겐 조금 너무한 대응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칸바일러는 다시 피카소의 주요 화상이 되었고, 특히 그가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를 제작할 때에 많은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것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인으로, 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으로 핍박받으며 그의 화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칸바일러는, 첫 갤러리 이후 다시는 자신의 이름으로 화랑을 운영하지 못하고 파트너나 가족의 이름으로 화랑을 열었다. 그리고 입체파 화가들을 발굴했던 것만큼 그 이후 눈에 띄는 작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앙리 루소(Henri Rousseau)와 호안 미로(Joan Miro)를 놓쳤고,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에서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로 이어지는 미술사의 한 커다란 흐름에도 합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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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그린 자신의 초상 앞에 앉은 칸바일러.

 

 

하지만 그것이 화상으로서 칸바일러의 자질이나 안목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대한 갤러리스트나 컬렉터라도 좋은 작가를 다 알아볼 수는 없기 마련이다. 좋은 작가, 위대한 작가란 개인의 시각, 취향, 또 시대의 상황과 필요, 운에 의해 복합적으로 결정되고 때로 ‘만들어지고’ 또 누락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바일러가 스스로 말했듯이, 결국 “위대한 화상을 만드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화상은 위대한 예술가를 알아보고 또 그들에게 적절한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늘 날을 세우고 있어야 할 것이다.

 

 

It is great artists who make great dealers.

 

- D. H. Kahnweiler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세잔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마치 “어퍼컷을 맞은 것 같았다”던 볼라르,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중요한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던 칸바일러처럼, 지금도 그런 충격을 받을 수 있을까? 요즘은 모든 영역에서 새로움이 넘치고, 동시에 옛것의 차용, 변용도 넘쳐난다. 뒤엎어버릴 확실한 주류랄 것도 실체가 없다. 동시대 미술에서 피카소와 칸바일러가 나올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모더니즘’ 예술의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느껴진다. 이 신화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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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The Man Who Held the Cubists Together” by Hilton Kramer, The New York Times, Sept. 2, 1990.

“Game Changer: Daniel-Henry Kahnweiler” by Michael Cary, Gagosian Quarterly, Spring 2019 Issue.

“[미술품 컬렉션 가이드] '영광과 비운의 화상 '칸바일러'”,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일자.

“허유림의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손’ : 입체파를 키워낸 거상 ‘그림보다는 사람을 낚는다’”, 허유림, 경향신문 올댓아트, 2019-05-28

“[이규현의 미술과 돈(19)]유명 작가 뒤엔 유능한 아트딜러가 있다”, 이규현, 주간조선, [1905호] 2006.05.22.

 

 



[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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