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름 공연의 묘미는 이곳,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공연]

23번째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즐기다
글 입력 2020.08.1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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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어느 무더운 일요일,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원래 계획과는 달리 하루를 늦게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어난 마당에 페스티벌을 종일 즐기기는 부담스러웠다.

 

미리 만들었던 타임테이블을 지우고, 쓰고, 몇 번을 반복해 공연 리스트를 정했다. 여섯 개에서 단 두 개로 줄어든 것을 보자니 그 여백만큼이나 마음이 허했다. 제대로 즐길 수는 있으려나.

 

안 좋은 생각이 겹겹이 쌓여 결국 가기 싫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소중한 티켓을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 순 없었다. 약속을 취소한 친구는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부질없는 생각을 싣고 달리던 지하철은 어느새 월드컵경기장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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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꼬인 일은 그다음 여정도 비슷하기 마련이다. 문화비축기지로 가는 두 갈림길이 있었다. 그 언저리 바닥에 붙어있던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스티커. 어정쩡한 위치라 나침반 역할을 하진 못했다.

 

선택은 내 몫이었다. 정문이냐, 후문이냐. 후문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뒷문이니까 정문 쪽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신호등 하나 없는 도로변이 나왔다. 도로인지 인도인지 모를 길이 하나 있긴 했지만, 페스티벌을 즐기기도 전에 힘을 더 빼고 싶진 않아서 후문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후문 방향으로 가기 꺼렸던 진짜 이유는, 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더운데 산까지 타야 하나 싶어서. 그러고 보니 문화비축기지 사진에 색이 두 가지뿐이었다. 초록과 옅은 황토색. 길을 제외한 공간은 모두 풀이 감싸고 있다는 말, 즉 산 중턱에서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것이다. 등반할 정도의 높이는 아니었다. 널따란 공터, 곳곳에 보이는 몇 개의 공연장. 드디어 왔다.


페스티벌 장소에 도착했다는 들뜸보다는 지친 느낌이 먼저였다. 생각보다 공간이 넓고, 관객이 거의 안 보이고, 스텝들은 많은데 딱히 안내해주는 건 없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이거였다. 처음에 입장명단을 받는 스텝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까이 다가가도 눈길을 피하고 딴청을 부리다 말을 걸어야만 답을 들려주었다.

 

환대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페스티벌 현장을 운영하는 스텝`이라는 역할을 받았다면 본인 일은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순간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상설전시나 보고서 후딱 집으로 갈까. 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세자매` 공연이었다. 보고 싶었던 공연이었지만, 수정한 타임테이블에서 어쩔 수 없이 뺐던 공연. 얼결에 입장 명단을 작성하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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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억 남는 건 초반의 연출이다. 얇은 천과 빔프로젝터의 조합. 말로 전하면 뻔하거나 지루할 수 있는 회상이 세피아 계통의 빛바랜 색과 어우러져 오묘한 감성을 만들었다. 아득히 멀어서 아련한. 내용은 꽤 격정적이긴 했다. 큰언니가 있는 서울에 가는 전날, 불안과 불신, 분노로 가득 찬 둘째의 마음을 막내가 달래준다. 둘째가 '비가 올 가능성'을 논하던 부분은 억지스럽지만, 이상하게 설득력 있다.

 

아마 나 또한 별나다 싶을 만큼 겁먹은 적이 수두룩하기 때문일 거다. 화가 옮은 것인지, 이번엔 둘째를 다독이던 막내가 감정을 터뜨린다. 반대로 둘째는 아까 막내의 포지션이다. 막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며.


스토리 전개가 꽤 아슬아슬하다고 느꼈다. 억지스러운 설정과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발이 주를 이루었던 탓이다. 그러나 페스티벌을 마음 열고 즐길 수 있게 해준 첫 공연이기도 했다. 두 배우의 호흡이 워낙 좋았기에 공연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호흡은 두 배우가 실제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중학교 동창이었는데 꿈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걸었다가 우연히 재회하게 되어 팀이 되었다는 소개말이 아직도 기억 남는다. 극에서도 하나의 꿈-서울에 가는 것-을 말하는 게 괜스레 연결된 흐름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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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공연을 보기 전, 상설전시 '귀로나-20'을 구경했다. 전시라고 해서 당연히 그림이나 사진을 떠올렸다. 그런데 두 개의 열린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테이블 위에는 QR코드가 있었다. 세 가지의 QR코드에는 연극의 주제를 정하고, 회의하고, 배우 오디션을 보고, 대본리딩까지 하는 전반적인 준비 과정이 차례로 나왔다.

 

방식이 새로웠다. QR코드 활용은 요즘 미술관에서도 자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연극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공연과 전시의 결합으로 느껴졌다. 비대면이라는 삭막한 상황과 생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낯섦은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이 덜어주었다.

 

프린트된 종이는 세 연극인이 각자 하고 싶은 연극에 관한 자료였고, 사다리 타기는 햄릿이 선정된 과정을 보여주었다. 비대면이 기본값이 된 현실에서도 공연은 죽지 않고 변화를 거듭하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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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풀밭 위에서 TT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해가 서서히 지고, 시원한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고, 공연자들과 호흡을 맞추듯 찌르르 울어대던 벌레들. 관객으로 찾아온 잠자리도 있었다. 가야금 두 대와 재즈 피아노, 보컬로 이루어진 독특한 팀. 따로 놀 것 같았던 요소들이 합주하는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몸에 힘을 주어 악기에 집중하는 연주자들도, 관객과 소통하려고 애쓰던 보컬도, 다 좋았다.

 

무엇보다 공연은 자연과 함께할 때 시너지가 커지는 것 같다. 만약 실내에서 최고의 음향으로 들었다면 이런 감상이 나오지 못했을 거다. 마냥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음향, 악기와 목소리보다 큰 벌레 울음소리, 다리를 간지럽히는 모기가 있었기에 황홀한 순간이었다. 살아 있는 공간에서 살아 있는 공연을 듣는구나, 싶어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TT의 공연을 끝으로 집을 향해야 했다. 이때, '살아, 숨쉬다' 공연 많이들 보러 와주시라는 스텝의 홍보를 들었다. 자연스레 발걸음은 나무데크로 향했다.


'살아, 숨쉬다'는 공연보다는 명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말 그대로 15분 동안 명상을 한다. 진행자가 한 사연을 낭독하고, 눈을 감고, 말소리를 듣는다. 물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풀 내음, 나무 냄새. 처음 해보는 명상 시간에 완벽히 집중했다곤 말 못하겠다. 하지만 잡생각이 몰려온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이 와도 나는 차분했고, 감정이 들이닥치지 않았다. 들썩이지 않고 고요했다.


명상 과정은 하나의 흐름 같았다. 긴장을 풀어 편한 자세를 찾아 나에게 집중한다. 들숨과 날숨으로 시작으로 심장의 박동을 느껴본다. 따뜻한 심장을 가진 나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건다. 내가 행복하길, 건강하길, 평안하길. 이 마음을 가장 가까운, 나에게 소중한 존재에게도 전한다. 당신도 그러하길. 여기서 더 나아가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에게도 전해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엔 세상 모두에게 이 마음을 들려준다. 싫은 사람도 모자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행복을 기원한다니. 생경하고도 꺼림칙했다.


명상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놀랍게도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뭉친 근육이 풀어진 듯한 개운함은 꼭 깊이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다리가 심하게 저렸다. 여운을 몸으로 느낀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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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어둑해진 주위.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여기저기 모기에 물리긴 했어도, 저녁을 걸러 배가 고프긴 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불안으로 시작한 하루의 끝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져 공연과 페스티벌에도 전과 같은 활력을 찾는다면, 이런 기회가 더욱 많아지겠지. 그날을 기다리며 후기를 마친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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