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차별주의자가 되기 싫어 차별을 하는 사람들

글 입력 2020.08.1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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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있었던 사건·사고나 이슈들을 재치 있게 패러디한 졸업사진을 선보이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한 인터넷 밈(meme)을 코스프레한 학생들이 인종차별적 행위와 관련하여 도마 위에 올랐다. 학생들이 패러디한 밈은 ‘관짝소년단’으로 불리는 가나의 장례 댄스팀이 관을 들고 춤을 추는 영상의 한 부분이다. 문제가 된 것은 패러디의 표현이었다. 학생들은 ‘관짝소년단’을 코스프레하기 위해서 얼굴을 검게 칠하는 행위인 ‘블랙페이스’로 생김새를 표현했고, 이에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는 SNS를 통해 불쾌감을 표했다. 네티즌과 기자들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그의 ‘오만한’ 행위를 비난했고, 샘 오취리는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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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지 않은 학생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낙인찍기엔 조심스러우나, 그들이 시도한 ‘블랙페이스’는 명백한 인종차별적 행위이다. 행위의 근원과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모두 인종차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블랙페이스는 19세기 중반 미국의 코미디 공연 ‘민스트럴쇼’에서 백인 출연자들이 흑인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기 위해 얼굴에 검은 칠을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흑인은 노예 및 하층 계급으로 등장하여 동시에 비하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흑인에 대한 비하이며 노예제의 찬동이다. 1960년대 이후 이는 흑인 민권 의식의 확산과 더불어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공공연한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지난해에는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과거 정계 입문 전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사진이 공개되어 총선을 앞둔 캐나다 정계에 큰 파장이 일어났고, 패션 브랜드 구찌는 새로 출시된 스웨터에 포함된 두꺼운 입술모양의 디자인이 블랙페이스를 연상케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트뤼도 총리와 구찌 모두 사과했고 구찌는 문제가 된 스웨터의 판매를 중단했다. 정치와 경제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블랙페이스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표적인 인종차별적 행위이다. 사실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제하고도 ‘관짝소년단’을 코스프레하기 위하여 그들의 피부색을 따라 하고 분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차별적인 대상화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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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페이스를 하지 않고 '관짝소년단'을 패러디한 광고

 

 

학생들은 인종차별적 행위를 했고, 인종차별의 당사자성을 갖는 사람이 불쾌감을 표했다. 이 당연한 사실의 결론이 불쾌감을 표한 사람의 사과로 엉뚱하게 매듭지어진 것은 이 일련의 과정 자체에 너무나 많은 불의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샘 오취리의 비판에는 오류가 없었으나 오히려 오류에 가까운 폭력적인 여론이 그의 사과를 이끌어냈다. 프레시안의 박세열 기자는 이러한 여론이 인종차별보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더욱 용납하지 않는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되기 싫어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정당화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이뤄졌다. 우선, 논점과 관련 없는 이슈로 발화자의 의도를 의심하고 주장을 왜곡했다. 샘 오취리가 해당 사안을 비판한 SNS 게시물에 케이팝의 가십을 뜻하는 'teakpop'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자, 이는 해시태그를 통해 사안을 알게 될 케이팝 팬들을 향한 고자질이며 케이팝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난받았다. 그가 해시태그를 단 의도를 알 순 없으나 인종차별의 피해 당사자가 인종차별적 행위를 고발하는 공적인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며 케이팝의 위신을 걱정하는 것은 논의와 무관한 우려다. 한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샘 오취리의 해시태그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지적한 한국의 교육이며 그것이 낳은 결과로서의 차별이다.

 

일반인 학생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글을 게재한 것과 더불어 과거 한 방송에서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표현하면서 눈을 찢는, 동양인 차별 행위로 유명한 표정을 지은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역시 논점과 벗어난 지적이다. 샘 오취리가 어떤 잘못을 했든 그가 비판한 차별의 성질과 양상,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지적하는 여론은 인종차별의 당사자인 그의 비판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 비판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만들거나 그가 겪었을 차별을 없던 것처럼 만들었다.

 

차별을 반성하여 추후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하지 않고, 차별주의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간편히 나누어 완전히 ‘선’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차별에 대해 논할 자격을 박탈한다. 그러니 차별적 행위나 사고를 지적받으면 자신이 차별주의자, 즉 ‘악’으로 규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완전한 ‘선’이 아닌 타인을 찾아 차별주의자로 규정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그리하여 차별을 비판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폄하하려고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차별주의자가 되기 싫어서 차별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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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정당화는 또한 당사자성을 흐리는 식으로 이뤄졌다. 샘 오취리는 인종차별에서의 약자에 속하는 흑인이며,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제노포빅을 중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외국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두 가지 혐오는 종합되어 더욱 심각한 차별로 나타난다. 그가 겪어야 했던 실제적인 혐오는 이미 그를 통해 숱하게 고발된 적이 있으며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로 한국 사회에 사는 흑인과 외국인에게 가해지고 있다. 따라서 패러디의 원작자들이 학생들의 패러디에 우호적으로 반응했다고 해서 샘 오취리가 엄연히 실재하고 경험되는 인종차별을 비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물론 차별을 비판할 자격이 따로 있다는 생각 자체가 매우 위험한 사고다). 그 역시 블랙페이스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의 피해 당사자이며, 패러디의 원작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쾌감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차별과 억압의 ‘당사자성’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선행되어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샘 오취리를 피해 당사자로 만들고 있다. ‘어디 흑인 주제’, ‘어디 외국인 주제’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비판하느냐는 비난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한국 교육을 비판하며 사용한 ‘ignorance’, ‘educate’ 등의 어휘가 아랫사람을 계몽하고자 하는 무시의 의도로 주로 쓰인다는 설은 근거도 없을뿐더러 해당 어휘는 블랙페이스가 자명한 흑인 비하의 맥락 속에 있는 것과 다르게 동양인 차별의 맥락에 분명히 위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흑인과 외국인이라는 특징을 비하의 용도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비판의 근거로 지목하기 위해 우위로 설정하는 모순을 범한다. 비하와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허구적인 우위의 설정은 차별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흔히 발생하는 오류다. 사람들은 샘 오취리의 지적에는 없는 모순과 오류를 통해서만 그를 공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차별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를 내세움으로써 정당화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차별의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은 샘 오취리를 비판하는 데 비중 있게 쓰인 논리였다. 물론 의도는 표현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지만, 블랙페이스라는 행위 자체가 인종차별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그대로 차용한 학생들의 ‘선한 의도’는 코스프레의 인종차별성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학생들은 ‘흑인을 코스프레하면서 블랙페이스를 하지 않을 시 오히려 ‘역차별’이 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이는 비단 블랙페이스의 인종차별적 맥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판이 아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어떤 성질로 인해 차별받는 이들을 또다시 그 성질로만 규정하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의 양산일 뿐이라는 사실의 간과이기도 하다. 심지어 규정의 주체가 차별의 가해자가 되기 쉬운 자리에 있다면, 불평등 구조의 평등화를 위한 움직임을 부정적으로 이르는 ’역차별‘을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기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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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고등학교 측에서 해명한 바에 따르면 해당 졸업사진은 교사들이 개입하지 않는 학생들의 자치 회의를 통해 기획되었으며 인종차별로 비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에 학급 투표까지 거쳤다. 투표 결과, 해당 패러디가 인종차별성을 띈다고 판단한 학생은 없었다고 한다. 샘 오취리가 지적한 대로 한국 교육은 인종차별에 대해 깊이 가르치지 않고 있고 이러한 맹점을 사회가 인식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 자치에 책임을 넘기는 학교 측의 태도가 씁쓸하다. 인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며 다수결로 결정될 수 없다. 투표를 통해 인권 문제를 논하게 한 자치의 장을 마련한 것은 학교이며, 교사들은 학생들을 다독이고 걱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체적인 반성과 교육의 개선을 꾀해야 한다. 샘 오취리가 언급했듯이 '다른 문화를 조롱하지 않는'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건 이후 또 다른 고등학교에서는 똑같이 블랙페이스를 통해 밈을 패러디한 졸업사진이 등장했고, 해당 사진을 찍은 학생은 사진을 첨부한 SNS 게시물에 샘 오취리를 태그하였다. 반성의 부재가 불러온 차별의 반복이 논의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발생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을 학생들이 걱정된다면 비판자를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반복하도록 방치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잘라내야 한다. 샘 오취리가 입고 나타난 티셔츠에 적힌 ‘대한민국’은 그가 지적한 부분대로 조목조목 개조되어야 한다. 차별에 방관하고 이에 대한 비판에 몇 배의 차별로 응수하는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참고기사


경향신문 김태훈, '코스프레'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조선비즈 이용성, [데스크 칼럼] '샘 오취리 논란' 유감

세계일보 김예진, '블랙페이스' 사진에… 트뤼도 재선가도 암운

프레시안 박세열, 샘 오취리는 잘못이 1도 없다

국민일보 박은주, "학생들은 외려 ‘역차별’ 고민했다, 흑인 비하의도 없었다"

부산일보 조경건, 공주고서도 '관짝소년단' 흑인 분장…이번엔 샘 오취리 해시태그까지

 

 

[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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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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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에댓글처음써본사람
    • 제가 인터넷에서 칼럼을 정독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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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합니다.
    •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샘오취리를 비판하는 인터넷 여론을 보며 느꼈던 불편한 감정들을 정확하게 텍스트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입니다. 좋은 칼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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