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과 죽음이 오가는 순간에서 그 진리에 대해 논하다 - 연극 '라스트 세션'

삶의 근간이 되는 물음에 답을 찾는 과정
글 입력 2020.08.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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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크기변환][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이상윤(1)(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연극 <라스트 세션>은 무신론자이자 정신 분석학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이트와, 무신론자였으나 기독교로 회심한 유신론자이자 저명한 비평가였던 루이스, 두 인물의 끊임 없는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사망 3주전, 그러니까 독일군이 제 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고, 영국이 독일에 선포한 최후 통첩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프로이트의 서재에서 만나 서로의 논리에 반박하고, 또 그것에 반박하며 전 우주적 존재인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논쟁한다.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끊임 없이 그들의 평화로운 논쟁을 위협한다. 전시 상황에 있어 언제라도 폭탄이나 독가스가 그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서재를 덮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고 프로이트의 입 속에 든 보철물이 끊임 없이 그의 생명의 줄을 잡아 당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몇 시간에 걸친 토론을 이어 나간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말하기를 멈출 수 없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사실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매우 궁극적이고도 기본적인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무신론자, 유신론자로 나뉘어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삶을 살아갈 에너지와 올바르게 살아갈 지침을 얻기도 하고 누군가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스스로가 정한 대로의 삶을 살아 나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이 도대체 왜 중요한 것이냐고 한다면, 아마 그것이 이렇게 우리의 전반적인 삶의 방향을 결정 짓는 근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는 정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의 경우, 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작은 행위에 대한 결정이나 결과 또한 스스로 정하고 받아 들인다. 만약 내가 신을 믿었다면, 죽음을 두려워 하기 보다는 그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 들이고 그에게 나의 결정과 행위의 근간을 맡겼을 것이다.

 


[크기변환][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이상윤,신구(2)(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근간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의 기저에 존재하고 있는 무의식을 밝혀 내고, 그것이 이끄는 우리의 삶을 분석할 수 있었다. 반면 루이스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그의 아들인 예수를 이 세상에 살게 하여 그의 가르침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우리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살아간다고 설파한다.

 

그들은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내면의 도덕률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프로이트의 경우 도덕률은 인간이 함께 생활하기 위해 그들 끼리 정한 약속에 불가하며, 언제든 변동되고 변색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루이스의 경우 도덕률은 신이 정한 것이며, 절대적이며 혼동될 수 없는 개념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근간에서 시작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펼친다.

 

두 사람 중 누가 옳은가에 대해서는 사실 정의 내릴 수 없다. 이 논쟁은 수많은 인물들이 수 세기 동안 걸쳐 논의해오고 있는 부분이지만, 우리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질문이니 만큼 하루 아침에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논쟁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그렇다고 해서 생각을 접어버리는 것 또한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을 우리 삶의 작은 순간, 언행, 생각 등 모든 것을 포괄하고 귀납하는 원초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보다 당장의 내일 나의 편안함을 위해 끊임 없이 우리 자신과 주변 환경을 개발하고 변화시켜 왔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상이 잠깐 멈춘 지금, 잠시 숨을 고르고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 이 연극은 그러한 생각의 장을 우리에게 열어주고 있다.

 

 

 

거대한 진리 앞에서 서로를 돕다



[크기변환][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이석준,남명렬(3)(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이 극의 배경은 앞서 말했듯이 제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주장을 옹호하며 전쟁의 불씨를 돋구었고, 영국군은 그러한 독일군에게 최후 통첩을 한 후, 그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전쟁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두 인물은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진리 앞에 한 없이 나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삶이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에 따른 논쟁을 이어갔지만, 막상 그 진리의 그림자가 문 앞에 드리웠을 땐,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본능에 사로 잡혀 허둥지둥 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둘은 급박하게 방독면을 찾고 책상 아래로 숨었으며, 프로이트 입속의 보강철이 말썽을 부렸을 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논쟁을 멈추고 서로를 도왔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진리에 대해 용감하게 파헤치고자 하지만, 그 진리가 숨통을 조여오는 순간이 오면 어떠한 논리 보다도 생존하기 위한 행위를 우선시한다. 그리하여 한마음 한 뜻으로 전시 상황과 같은 급박한 위험 상황에서 두 인물은 서로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행위가 앞서야 하는지, 그 행위의 정당성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지가 두 인물에게 합의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세상의 진리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시간 동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그러한 진리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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