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특별해진 오늘에 어울리는 맛 - 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고통을 잊게 해주는 달콤함과 씁쓸함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7.2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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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노경무 그림│김록인 소설

바다는기다란섬


 

'주세요 달콤한 그 맛, 아이스크림. 특별해진 오늘에 어울리는 맛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설렘과 기대로 가득한 마음을 담고 있는 이 가사는 평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말이다. 한 드라마에서는 '술이 쓰다.'는 아들의 말에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거다.'라 담담히 말하는 아버지가 등장했다. 당신은 '맛'이 느껴지는 하루를 살아본 적 있는가?

 

 

 

I. 레몬청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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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민'이라는 향긋한 이름의 태국 식당에서 꽤 성실히 아르바이트에 임하던 화자는 식당에서 마주친 많은 이들을 섬세하게 관찰한다. 말수는 적지만 정성껏 음식을 만들던 주인아저씨, 몇몇 단골 들의 선호 메뉴, 배운 태국어를 활용하고자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과는 달리 드물게 오던 동남아시아 유학생들… 그러다, 한 풋풋한 커플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은 동행한 사람치고 함께 식사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인데, 누군가는 식사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지켜보고, 어떤 때는 포장을 해가는 조금 묘한 모습을 보인다. 어딘가 불편한 듯 내내 절뚝거리던 여자의 모습이 기억에 각인된다. 화자는 몇 달 뒤, 멀쩡해진 다리와, 비어있는 옆자리로 연달아 레몬청을 시키는 여자의 텅 빈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짧은 평화가 지나갔다. 주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네 시 반이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혼자였다. 두꺼운 책을 식탁에 대고 그 위로 몸을 한껏 구부리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지, 졸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카운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서 그녀가 다가왔다.

 

"열세 잔이요."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목소리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열세 잔."

나는 그녀에게 거스름돈을 건넸다. 유리병은 거의 비어 있었고 플라스틱 통에는 잘근잘근 씹었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레몬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 레몬청 만드는 법 中

 

 

자스민에 찾아왔던 남자와 여자가 실제로 연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리가 불편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무언가의 사고로 간호를 해주어야 하는 사이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남자의 모습은 부자연스럽다.

 

둘 사이의 관계가 무엇으로 정의되든 간에, 늘 미소짓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던 여자에게는 남자가 무척 소중한 인연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열세 잔의 레몬청을 탄 차를 짓씹어 마시는 동안 그녀는 그를 곱씹고, 또 곱씹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화자는 글의 마지막에서 '그녀에게 레몬청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는 말을 남긴다. 그녀에게 있어 그날은 무언가 사무치게 슬프고 외로운 날이었고, 그의 빈 자리가 느껴지는 날이었으리라. 달콤한 레몬청의 맛으로 덮고, 또 덮으며 누군가를 떠올릴 만큼.

 


 

II. 핑거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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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무언가의 이유로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이 화자에게 찾아온다. 약물, 인지, 미술, 언어, 음악 치료 등등.. 두루 거치고도 차도가 없어 상담사의 권유로 '핑거라임 요법 시술'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다.

 

성분 중에서 신맛을 내는 '시트르산'의 양을 백 배, 쓴맛을 내는 헤스페리딘의 양을 오십 배 강화한 개량종 핑거라임을 사용해 일종의 충격 요법을 주는 시술이다.

 

 

니코틴이나 아편처럼 갑자기 끊었을 때 식은땀이 나거나 온몸이 아픈 육체적 증상은 없지만, 불안하고 초조해지면서 핑거라임을 딱 하나만 더 먹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핑거라임을 씹는 순간에 느낀 고도의 해방감,평상시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났던 감각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치료과정 전체에 적신호가 켜진다. 핑거라임에 익숙해지면 보다 큰 자극, 보다 큰 고통이 필요해지고, 근본 원인을 고스란히 남긴 상태로 문제를 덮어 버리는 악순환의 고리만 굳어진다. 우리의 의도는 일시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지, 도피성 짙은 방어기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 핑거라임 中

 

 

그런데, 화자는 내담자들의 다양한 케이스 속에서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잊게 해주는 절대적인 '핑거라임'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쓴 약을 먹고 사탕을 삼켜 더 자극적인 맛으로 미각을 눌러보려는 시도처럼, 과거의 트라우마를 지우려 하거나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저마다의 '핑거라임'을 만들고 의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문제는, 문제를 마주하기 어려울 때 도피하고자 하는 심리란 모든 사람에게 있어, 내담자가 맹신하던 일종의 핑거라임인 '귀마개'를 화자 또한 귀에 끼운 것이다.

 

*

 

당신에게 오늘 하루는 어떤 맛이었는가? 서른한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처럼 희노애락이 격렬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고, 때론 물에 물 탄 듯 싱거운 날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별의 쓴맛을 짓씹게 해주는 달콤한 맛 절반과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잊게 해주지만 자꾸만 찾게 되는 짜릿한 맛 절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콤한 향이 느껴질 듯한 짙은 레몬과 라임 색 표지와 삽화를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침샘이 뻐근해진다.

 

당신의 특별해진 오늘에 어울리는 맛은 어떤 맛인가? 레몬청이 필요한 날, 핑거라임이 필요한 날에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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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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