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밤이 지나가기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면 [문학]

손보미, 「밤이 지나면」
글 입력 2020.07.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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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우리를 쉽게 지배한다. 벗어나는 방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둠을 지나치는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설사 일어난다 해도 쉽게 와해된다.

 

이야기는 어둡고 축축하다. 주인공이 말을 잃었기 때문일까, 제목부터 나타나는 ‘밤’이라는 이미지 때문일까. 분위기는 가라앉아있고 묵직하다. 젖은 풀과 흙냄새가 난다. 하지만 절대 우울하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 주인공이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면 질문이 하나 생긴다. ‘밤이 지나면’ 진짜 무서운 게 사라지게 되는 걸까?

 

*

 

강제로 부모와 헤어지고 친척의 집에 맡겨진 주인공은 말을 하지 않는다. 외숙모와 외삼촌, 전학 간 학교의 선생님과 친구의 태도는 주인공의 입을 더욱 다물게 만든다. 그런 주인공은 동네의 ‘정신 나간 여자’에게만 말을 연다.

 

예지몽을 꾼다는 둥 온갖 소문을 가지고 있으며 동네의 변두리에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여자.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항상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다니는 여자. 남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신비로운 이미지 때문일까, 주인공은 여자에게만 입을 열며 이곳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여자를 선택한다. 여자에게 ‘자발적으로’ 납치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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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과 정신 나간 여자가 빨간 티코를 타고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 벗어나는 것은 환상적으로 보이며 기대되고, 성공적으로 보인다. 꿈처럼, 정말 이곳을 벗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가드레일에 박는 사고와 함께 그들은 금방 현실로 돌아온다. 환상처럼 벗어났던 상황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당연하게도 매일 아침이 오는 것처럼, 세상의 것들이 자신의 궤도에 착실히 오르는 것처럼.

 

빨간 티코가 가드레일을 박는 사고 장면은 경계에 부딪히는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그들은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차를 버리고 비탈길을 걷는다. 그들은 공동묘지를 마주 보고 앉는다. 추운 날씨와 사고로 인한 상처로 헐떡대면서, 마치 그들이 가고 싶어 했던 것만 같은 이곳이 아닌 저곳, 다른 세계를 바라보면서.

 

주인공은 그곳에서 그토록 두려워하던 밤과 어둠에 다시 사로잡히고, 곧 그 공포를 극복하는 듯이 보인다. 여자가 쓰러진 상황에서 주인공은 눈을 감고 지구 반대편의 밤이 아닌 낮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닫는다. 상상해봐야 자신은 지금 밤이 내려앉은 공터에 정신을 잃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밤과 상관없이 한 쪽에서는 들개들이 짖고 있으며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소리 지르듯이, 길을 잃었다고 ‘말하게’ 된다.

 

“너는 앞으로 상상도 하지 못한 그런 삶을 살게 될 거야.”

 

그렇게 주인공은 자발적인 납치에서 풀려나며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 여자에게 들었던 수수께끼 같은, 희망차면서도 섬뜩한 이 말을 영예은에게 다시 돌려준다.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이라는 말이 어딘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

 

주인공은 아직도 문득,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금방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낯선 비탈길이 아니라 다시 자신이 걸어야 할 길에 오른다. 주인공은 금방 ‘정신 나간 여자’를 잊었고 그녀의 입장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빨간 티코와 사고와 공동묘지와 들개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외삼촌처럼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면, 괜찮아질까. 아니면 진짜 무서운 것을 외면하고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오듯이 당연하게 살면 괜찮은 걸까.

 

주인공은 되돌아왔고 ‘정신 나간 여자’는 떠났다. 이야기는 이상한 여운을 주면서 끝이 난다. 여자는 ‘변기’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반복과 함께 ‘변기’라는 단어는 특색이 사라지면서 아무것도 아닌 단어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변기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내려가는 물이 떠오른다. 큰 소리를 내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 그 소용돌이 속에서 누군가는 나오지 못해 계속 맴돌고 누군가는 튕겨 나온다. 우리는“단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텅 비어버린” 것처럼 튕겨 나가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읽는 우리가 “그녀를 외면하고 눈을 감아버리게” 되는 것처럼.

 

해가 뜨면 어둠은 사라진다. 하지만 해는 언젠가 지기 때문에 어둠은 또다시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어둠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어둠을 뚫고 달려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외면은 너무 짧고 우연은 잘 일어나지 않으며 진정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까.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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