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성에게 무기력을 강요하는 국가에서 살아남기

글 입력 2020.07.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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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일주일 동안 흘러나온 뉴스들은 장마로 내내 눅눅했던 하늘을 더욱 우울하게만 만들었다.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직함과 부처 이름을 달고 성폭력 가해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에 조화를 보냈고, 사법부는 다크 웹 ‘웰컴 투 비디오’를 운영하며 아동 성착취물을 판매하였던 아동성폭력범 손정우의 미국 송환 요청을 거부하여 1년 6개월 만에 그를 석방시켰으며,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었다.

 

우선,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빈다. 죽음 앞에서의 슬픔을 재단하거나 판단 내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그러나 여성과 피해자는 철저히 배제된 의견들이 중첩되고 기사화되어 권력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주일이 마치 여성이라면 꼭 그래야만 하는 듯 무기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오늘도 여성 주민이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만 동승하는 어느 남성 주민이 로비에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한다. 일주일간 들려온 소식들은 그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감내하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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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나 그 전에 이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세상에 글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불합리한 세상이 당장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힘을 빼앗기는 일보다 힘이 실리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앞으로도 여전히 답답할 세상을, 다만 타파할 용기가 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금의 연속된 소식들이 더욱 절망스러운 이유는 그로 인해 무기력해져서라기보다, 그것이 여성이 무기력해지기를 바라는 움직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성폭력으로 모든 정치적 자격과 신의를 박탈당한 가해자와 정치적인 이름으로 관계 맺고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는 정부가, 다크 웹 특성상 국제적 공조가 필요한 성범죄 사건에 이를 거부하고 솜방망이 처벌로 사건을 종결지으며 수사 기회를 허공으로 날린 사법부가, 다년간의 권력형 성폭력을 사적 영역으로 일축하는 서울특별시가 국가 기관으로서 기능하는 모습을 보며 여성과 피해자들이 도대체 어떠한 용기를 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피해를 입은 자신을 더 이상 밉게 보지 않고 떳떳하게 설수록 돌아오는 말은 가해자에게 관대해지라는 말이다. 피해자의 용기는 가해자의 명예를 위해 거세당한다. 가해자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상에서 피해자의 용기는 눈엣가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여성이 무기력해지기를 바란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된다.

 

무기력은 직접적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개선되지 않은 시스템이 건재하다는 사실의 방증을 통해 암시된다. 피해자가 상사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데 큰 압박으로 작용했던 ‘정치적 인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로써 강요된다. 을인 수행비서가 갑인 상사의 그림자가 되어야 하는 거시적 시스템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강요된다. 똑같은 사건의 사이트 가입자들이 외국에서 징역 20여 년을 선고받는 동안 한국에선 운영자가 18개월을 선고받은 불합리한 결정에 대하여 이는 디지털 성폭력의 양형 기준이 미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대체됨으로써 강요된다. 단체장의 후진적인 성 인식과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위계 구조라는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지 않고 집무실의 침실을 없애자고 주장하며 성폭력을 ‘제어할 수 없는 남성 성욕’에 의한 것으로 사고하는 국회의원에 의해 강요된다. 그리고 이는, 여러 차례 여성 혐오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유일한 입장으로 표명한 ‘대통령의 남자’가 의전비서관으로 승진하는 청와대에 의해 수월해진다.

 

삼권분립을 탓하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은 이유다.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지 않은 사법부와 성범죄 관련 법안이 성실하게 마련되지 않고 기초적 논의마저 계류되는 입법부에 이어,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를 앞에 두고 그 원인이 지속됨을 보여준 행정부까지 모두 피해자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점에 있어 세 국가기관은 결코 분립되지 않는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혐의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을 때 개최되었던 시위 속 구호처럼,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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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껴야 할 기본적 공동체인 국가로부터 오히려 소외감과 좌절감을 부여받는다. 자동반사적으로 느껴지는 무기력감에 스스로 더욱 화가 났던 것은, 여성은 국가에 특정한 영역에서는 항상 기운 있게,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요구받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동성폭력범이 ‘여기서 처벌받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고 비는 나라에서 오늘도 여성은 애국을 위하여 결혼하고 출산하기를 요구받는다. 충남도지사와 부산시장, 서울시장이 모두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당하는 동안 개선도 성찰도 보여주지 않은 소속 정당의 일부 지지자들은 정쟁에서의 승리와 지지율의 하락 방지를 위하여 침묵하는 남성 의원들이 아닌 ‘효과적인’ 여성 의원들의 스피커를 폭력적으로 요구하였다. 여성을 여성이 없는 세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끌어들인다.

 

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고소한 것인가, 왜 하필 발인식인 오늘 기자회견을 열었는가, 왜 가만히 있었는가, 왜 가만히 있지 않은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적인 질문들은 마치 피해자가 무기력해야 할 일과 무기력해서는 안 될 일이 정해져 있어 이를 어기면 안 되는 것처럼 제기된다. 사실 여부가 확정되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고인의 죽음으로 인해 국가에서조차 피해자의 안위를 보장해주지 않는 성폭력 고발이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일단락되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고인의 죽음 뒤로 정당의 지지자들은 물론 성폭력을 남성의 ‘사적 문제’로 일축하는 발화자들, 그리고 정치인들까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주도한다. 그들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가해에 활용된 고인의 권력과 명예를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이 모든 일의 명목으로 삼는 ‘인간애’가 왜 어떤 인간은 분명하게 배제하는 것인지 의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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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의 사망 다음 날인 7월 10일,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주최한 손정우 미국 송환 요구 시위에 참여했다. 하루 전에 급히 공지된 시위임에도 불구하고 쌓인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수많은 시위자가 함께 했다. ‘사법부도 공범이다, 강영수는 자격 박탈, 손정우는 미국으로’를 구호로 외쳤던 시위는 여타 시위처럼 무엇을 요구할 목적이 아니라, 무엇의 종말을 선언하는 시위처럼 느껴졌다. 요구하고자 하는 것을 청원의 형태로 국가 기관에 맡기는 단계를 지나, 이제 국가기관의 신뢰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세계로의 진출을 공표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보호조차 기능하지 않는 국가를 뒤로하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어떠한 미래를 가져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희망 마른 기대로 겨우 남은 불씨를 지펴본다. 시위가 마무리될 즈음 연호한 ‘우리가 새로 고침’이라는 구호를 되새기며, ‘새로 고침’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에 여전히 불안한 밤을 기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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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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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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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숨쉬는
    • 이 글을 포털에서 읽고 너무 눈물이 났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이런글을 읽으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 다잡고 애써보려고 합니다..
      아트인사이트 처음알게됬어요.회원가입도 방금했고요.,
      세상에 혼자인것 같았고 너무나 외로웠는데..
      괴물같은 세상에 그러지말라고 약자의 편에서 응원해주고 도움을 주는분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생각하니까.,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너무나 살고싶었거든요.,
      .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글을 써주셔서요.,
      그들도 읽었으면 좋겠어요..,
      많은사람들이요.,

      그리고 박원순씨 외부조사자 추천하고싶었는데.,
      제가 아는..정의롭고 너무나 인간다운 분이요..
      법무법인 창조 강보경변호사님.,.
      얼마전 죽으려던 저를 살려주신 분이에ㅛ

      왜 살렸냐고 오히려 화를 냈어요
      살려달라고 죽겠다고 반대로 말했나봐요
      산소치료를 받고 살아났고
      세상이 얼마나 권력앞에 비겁한지..
      도저히 저같은 사람은 알릴수도 밝힐수도 없지만..
      .꼭 밝혀져서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받길 바래요..

      저처럼 권력앞에 희생되어 저항할수록 처참히 짓밟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에게..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글 한줄이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가졌구나..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어요.,부럽습니다..
      저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건강하세요,  지치지말고 힘내주세ㅛ.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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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토리
    • 저의 분노의 감정들을 언어로 날카롭게 표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력함으로 지내던 저번주를 보내고 에디터님의 글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해보려고 해요. 여전히 불안한 밤이지만 오늘은 에디터님의 글이 있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많은 위로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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