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동적인 문화 소통의 장, 대안공간 루프의 '멜팅팟 속으로' [시각예술]

낯선 문화 사이의 접점을 찾아서
글 입력 2020.07.1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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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팅 팟'과 '핫 팟'


 

국가와 국가를 가르는 경계선은 점차 투명해져 간다. 고도로 발달된 통신기술과 교통기술로 우리는 제한된 국가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이제 ‘단일 문화’라는 단어는 무의미해졌다.
 
국제적 인구 이주를 둘러싼 수많은 이슈들은 각 장소의 크고 작은 문화적 특성들을 세계 곳곳에 퍼뜨렸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흐름 속에서 등장한 ‘멜팅팟(용광로) 이론’이란, 용광로 속에서 철이 녹아내리듯이 이주민이 원주민의 문화와 전통에 동화되어 본연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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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안공간 루프에서 개최되는 《멜팅팟 속으로》는 ‘멜팅팟 이론’의 개념을 살짝 빗겨 간다. 2020 독립 큐레이터 공모에 선정된 젝스턴 수 징시앙과 니엔-팅 첸은 친목회나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하는 아시아의 가정 요리 ‘핫 팟’에서 이 전시의 시작점을 찾는다. 이 요리는 냄비 속 끓는 육수에 각자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넣고 함께 조리하는 음식으로, 한 가지 육수 속에서 각 식재료들은 서로 결합되어 깊은 풍미의 국물을 완성한다.
 
그러나 완성된 요리 속에서 어떤 식재료를 내 접시에 담을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리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맛보게 되는 국물에는 모든 재료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를 통해 각 개인들은 국물을 맛보며 다른 문화에 익숙해지는 방식을 훈련한다. 즉 이번 전시에서 멜팅팟은, ‘문화 교류가 갖는 유연한 과정에 대한 훌륭한 은유가 된다’(참고-전시 서문).
 
전시가 이야기하는 ‘핫 팟’은 글머리에서 언급한 ‘멜팅팟’과 표면적으로는 흡사하다. 그러나 멜팅팟 이론이 용광로 자체에 집중하여 기존의 기반, 즉 용광로 속에서 끓고 있는 철에 각기 다른 요소들이 융화된다고 보는 한편, ‘핫 팟’ 속 육수는 각기 다른 식재료들의 영양분과 맛을 포용하는 훌륭한 기초재료이다.
 
나아가 ‘핫 팟’은 이 요리를 수용하는 개인의 취향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번 전시 또한 훌륭한 핫 팟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다문화 사회를 외치지만 아직까지는 낯선 문화에 경계심을 갖는 우리 사회의 개인들에게, 《멜팅팟 속으로》는 젊은 동시대미술가들의 시각으로 이종문화와의 접점을 제공한다.
 
 
 
혼동과 모호함, 소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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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다래, 언어는 나를 불확실한 사람으로 만든다, 2019, ‪08:40‬

 

 
그렇다면 이제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살펴 보자. 전시장 1층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백다래의 <언어는 나를 불확실한 사람으로 만든다>이다. 영상 속에서 작가는 불규칙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스코틀랜드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배경음악은 스코틀랜드의 풍경 속에서 느끼는 상상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으로, 이는 작가는 스코틀랜드에 거주할 당시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스스로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나의 정체성을 공고히 구축해 왔던 모국어가 타지에서는 도리어 혼동과 방황을 불러일으키게 된 작품 속의 상황은, '핫 팟'이 이끌고자 하는 낯선 문화와의 교집합을 직간접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국어가 우리의 국적과 생활문화 등을 탄탄히 뒷받침해 왔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그 경계선 안쪽으로 우리를 가두어 왔다는 생각마저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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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 랑게, 운동의 법칙, 2018, ‪03:18‬
 
 
<언어는 나를 불확실한 사람으로 만든다>에서 시작된 '기준치에 대한 의구심'은 제프 랑게의 <운동의 법칙>에서 한결 생경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설치된 영상 속 두 소녀는 폐허가 된 수도원 안에서 알 수 없는 동작으로 춤을 춘다. 그들만 알 수 있는 무작위적인 규칙으로 짜여지는 춤은 두 소녀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고 해체한다.
 
제목 '운동의 법칙'이 이들의 움직임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작품 속에 꾸준히 등장하는 오렌지를 의미하는 듯한, 계단에 널려 있는 여러 개의 가짜 오렌지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남는 '모호함'이라는 감정은, 어찌 보면 전시의 커다란 주제를 꿰뚫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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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 마오, 마오 마오의 행복한 카와이 친구들 2020, 2020, ‪06:35
 
 
지하 1층의 계단 뒤편에 아늑한 방처럼 꾸며진 공간의 벽면에는 마오 마오의 <마오 마오의 행복한 카와이 친구들>이, 테이블 위에는 안드레이 키사이의 <방학>이 위치한다.
 
<마오 마오의 행복한 카와이 친구들>은 2020년 이후에 이후에 작가가 겪은 여러 사건들, 즉 대만의 대통령 선거와 코로나 19 등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한 애니메이션 형식의 시각적인 논평 시리즈이다. 이때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밝은 색감과 게임 사운드처럼 들리는 신나는 배경 음악은 심각한 내용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자세히 살펴 보면 스스로 꼬챙이에 꿰여 통구이가 되는 돼지들, TV 속 사람처럼 되고 싶어 절단 수술을 받는 캐릭터 등이 등장한다. 이들의 기괴한 행위는 발랄한 배경음악과 아기자기한 이미지들과는 전혀 어우러지지 않으며 이질적이고 양가적인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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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이 카사이, 방학, 2018, ‪02:25‬
 
 
안드레이 키사이의 <방학>은 2분 가량의 짧은 영상 작품으로 선명한 파란 색감으로 여름 휴가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러나 파도치는 풍경은 마치 벽과 같고, 그 중앙에는 TV 모니터가 자리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TV가 있다면 우리가 열망하는 삶이 실제로 필요할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방학>에서 언급된 소비문화에 대한 이야깃거리는 평화로운 휴식과 혼잡한 군중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지안루카 아바테의 <슈퍼마켓>으로 이어진다. 소비 사회의 낭비 문화와 물질 과잉의 시대는 우리의 일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아시아 문화와 탈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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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하마드 테이무어, 집(가정), 2013, ‪08:13‬

 
 
무하마드 테이무어의 <집(가정)>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대화를 담은 작품이다.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테이블과 의자, 작은 TV와 진공청소기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얼굴을 가린 채 대화를 이어가는 두 인물은 약혼한 사이이다. 이들은 서로 대응하지 않는 물음과 응답을 반복한다. 이들은 몇 분에서 몇 달 전에 상대가 질문했던 것에 답변한다.
 
각자만의 관점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분절되고, 가정의 역할이라고 여겨지는 안정성과 원활한 소통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그리고 나아가 작가는 '바람직한 가정이란 과연 집 안에서만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물리적으로 내부공간을 바깥과 분리하는 '집'과 비물질적인 '가정'의 개념은 일치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는 일반적인 가정을 연상시키는 가구와 가재도구들, 예비 부부가 등장하지만 공간을 분리하는 벽은 부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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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트 찬, 세니(예술), 2020, 30:39

 

 
켄트 찬의 <세니(예술)>은 큐레이터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싱가포르의 전설적인 일화를 주제로 한다. 1955년에 화가이자 건축가, 싱가포르 예술 협회 회장이었던 호 콕 호는 몇 달간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6명의 싱가포르 예술가들과 함께 200개가 넘는 작품을 들여왔다고 한다.
 
유럽에서 열린 싱가포르 예술의 첫 전시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세니(예술)>은 호 콕 호의 포부에 의구심을 표한다. 그가 추구했던 열대의 근대성은 어찌 된 일인지 식민지성에 신빙성을 부여했다고 말이다. 제목 seni 또한 서양적 의미의 예술에 가장 가까운 말레이어이다.
  
 
"이 박람회, 우리의 짧은 역사에 먼 옛날을 덧씌운 것이다. 아마 호는 우리 자치권의 씨앗을 뿌리며 유산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식민지, 경작, 문화 그들의 라틴어 어원을 공유하며 그는 우리가 지금쯤 서양의 복사본(Western facsimile)이 될 줄 결코 몰랐을 것이다."
 
- 켄트 찬, <세니(예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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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라얀논 시리폰, 인터내셔널, 2018, ‪06:00‬
 
 
그리고 출라얀논 시리폰은 <인터내셔널>에서 일본 교복을 입은 동남아시아 걸그룹으로 분한다. 이런 유형의 걸그룹은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작품 속에서 여러 명의 소녀들로 등장하는 작가는 1992년 록 밴드 '당나라'가 편곡한 '인터내셔널'을 부르고 있다. 이 노래는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이념을 대변하는 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시아 이곳저곳의 이데올로기와 문화로 범벅된 뮤직비디오는 혼종 그 자체이다. 무엇을 옹호하는지, 무엇을 비판하는지조차 명백히 짚어낼 수 없지만 여러 경계선을 뒤섞고 흔들어 버린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그리고 이는 유 첸 쿠오의 <장자의 꿈(호접몽)>에서도 드러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가? 무엇이 실제고 무엇이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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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렐 판 라에러, 라르고, 2016, ‪08:23‬
 
 
카렐 판 라에러의 <라르고>는 어지러운 시스템 속에서 힘을 잃은 개인의 모습을 담은 퍼포먼스 기반 비디오 아트이다. 작품 속 작가는 네덜란드의 관광명소, 번화가, 도시 풍경 등을 거치며 서서히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이때 작가는 누워 있는 채로 미동도 없이 그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뿐이다. 제목 '라르고' 역시 '느리고 장중하게'를 의미하는 음악 용어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 사회의 구조 안에서 '느리게'를 고집하는 작가의 모습은 동시대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도 다가오지만, 이와 동시에 한없이 취약한 개인의 신체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르고>에서의 신체의 무력감은 임수진의 <자유의 광장으로 가는 길>에서 단숨에 전환된다. 작가는 테헤란의 거리에서 신체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방법을 실험한다. 이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춤을 추는 것이 불법이며, 여성의 경우 스카프나 천으로 몸을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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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의 작품들 사이에는 국경이나 언어, 매체나 이데올로기, 소비문화 등 수많은 키워드들이 부유한다. 작가들이 제시하는 모든 작품들은 어느 한 가지 범주로 묶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의 '핫 팟', 곧 《멜팅팟 속으로》라는 전시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의 역할이란 각자의 장소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건, 그 장소의 특성은 모든 작품들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포괄적인 주제의식을 제시한 뒤 개성 있는 작품들을 퍼뜨려 놓고, 관람객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다소 불친절한 방식의 전시는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핫 팟'이라는 흥미로운 개념 하에서 공고히 선언하고 직접적으로 관람객에게 능동적으로 각기 다른 문화를 접해볼 것을 제안하는 것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집요하게 한 가지 주제만을 따르지 않는 전시인 만큼, 작품들 내에서 다양한 키워드를 접한 뒤 그 배경이 되는 장소의 문화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느끼는 것이 더 적합한 전시였다. 이에 더해, 모든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나 그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 또한 눈여겨볼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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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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