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음악으로 백색소음 채우기 [음악]

내 white noise 재생목록엔 OST 앨범이 잔뜩 있다.
글 입력 2020.07.0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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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중할 때 가사가 없는 노래를 들어



나는 재생목록을 꽤 열심히 만드는 편이다. 그때 그때 필요에 맞게 듣는 음악들이 따로 있어서 그런지 재생목록 이름들도 ‘그런 음악이 필요한 때’에 맞춰서지었다. 그냥 듣는 노래 (정말 아무거나 듣고 싶지만, 그렇다고 너무 아무거나 듣고 싶진 않을 때 트는 노래들), for my parents (부모님과 드라이브 중에 듣는 노래), Run and Run (운동할 때 듣는 노래), 그리고 오늘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white noise (공부하거나 집중할 때 듣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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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생목록은 보통 카페나 도서관에서 뭔가를 할 때 듣는 노래들 모음이다. 한국어 가사가 들리면 집중하던 게 다 무너져버려서 그럴 땐 가사가 아예 없거나, 영어나 스페인어, 일어, 불어 같은 외국어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듣는다. 애플 광고음악으로 쓰였던 Phildel – the kiss, 재즈 입문 곡으로 좋은 Chet baker, 히사이시 조 등이 포진해있다. 자, 집중. 이 재생목록에서 주목할 점은 한 앨범의 전곡이 쭉 들어와있는 경우가 많다. 그게 뭐냐면. 내가 감명 깊게 보고 들은 영화의 사운드트랙들.

 

 

 

잘 지내고 있나요? – Love letter OST



인생에서 최고의 영화를 하나만 꼽아보시오. 내 답은 주저 없이 러브레터다. 이와이 슌지 작. 1995년. 겨울이면 눈이 가득 쌓이는 삿포로를 배경으로 하는 이영화는 영상, 시나리오 등이 모두의 감수성을 팍팍 자극하는 그런 영화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백미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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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의 작곡가는 Remedios. 공식선상에 나타난 일이 많이 없던 건지, 그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었다. 혹자는 사실 그의 정체는 히사이시 조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더 찾아본 결과 그건 아닌 것 같다. 일단 나무위키는 remedios에 대해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본명 호리카와 레이미. 언니가 갖고 있던 사진이 관계자 눈에 띄어 데뷔. 1993년부터는 remedios라는 이름으로 드라마나 영화 사운드 트랙, 광고 음악을 작업’한다고 정리해 놓았다. 특히 이와이 슌지의 영화에 다수 참가하며 이와이 미학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진다.

 

Remedios는 스페인어로 치유의 신, 치유하는 약, 치료의 사명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다면 그 이름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터. 실제로 이와이 슌지는 그를 천재의 결정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멜로디가 아닌 멜로디 본연의 담백함을 강조하고 있다. 오케스트레이션을 이용하여 감성을 극대화시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곡에서 레메디오스는 오직 피아노 한 대만을 사용할 뿐이다. 첫사랑, 러브레터, 겨울, 하얀 눈 이 모든 이야기가 지닌 통일성 위에 음악은 말없이 소복이 쌓이는 눈과 같다.

 

또한, 그녀의 음악에는 절제가 있다. 편성이 아닌 멜로디만으로도 감정의 기복을 극대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선에서 감정의 과잉을 제어하고 있다. 마치 수묵화를 그리는데 채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먹의 농담에 의한 담채화로 작품의 단아함과 깊이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런 절제는 결과적으로 애절함을 더욱 극대화하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많은 관객이 히로코의 감정과 동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적어도 중고등학교 시절 연애편지를 써봤던 이들이라면 눈 밑이 촉촉해졌을 것이다. (출처 재즈칼럼니스트 김충남, 수묵담채화 같은 영화 그리고 음악, 영화 러브레, 위드한성.)

 

 

매년 겨울마다 이 영화를 보고, 틈만 나면 듣는 이 사운드 트랙 덕분에 이제 음악만 들어도 영화의 몇 장면이 떠오르는 경지에 이르렀다. 뜨거운 바람이 부는 여름에도 이 음악만 들으면 가득 쌓인 흰 눈이 그려지고 냉기가 느껴지는 듯하니까.

 

자료를 찾던 중 운이 좋게 어떤 장면에서 어떤 사운드 트랙이 나오는지 정리한 논문을 발견했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히로키가 조난당한 산에 잘 지내냐お元気ですか고 묻는 그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gateway to heaven. 가장 유명한 OST인 a winter story는 히로코가 이츠키 집 앞에서 편지를 쓰는 장면, 이츠키(여)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이츠키(남)가 책을 건네주는 장면, 후에 학교로 돌아가니 이츠키(나)의 전학소식을 접하게 되는 장면에 나온다.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사운드 트랙이라면 이 정도쯤은 알아두어야지 싶어 적어본다.

 

아, 마지막으로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이 a winter story는 첫사랑의 느낌을 가장 순수함으로 표현하고 싶어 8살 어린이yui makino의 연주를 녹음한 것이라고 인터뷰 중 밝혔다고 한다. 당시 피아노 신동이라고 찬사를 받던 그는 현재 일본의 성우 겸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Call me by your name. I’ll call you by mine. – Call me by your name OST 



이번엔 여름 영화로 이야기해볼까 한다. 특히 이 영화 OST 앨범은 2018년 가장 많이 팔린 바이닐 (LP)로도 꼽힌다. 영화는 기존 유명 아티스트의 곡을 그대로 삽입했고, 바흐, 류이치 사카모토, 슈프얀 스트빈스 등 나름 시대를 풍미한 이들의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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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트랙 17곡 중 7곡이 피아노곡이라는 글을 봤다. 내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곡들은 가사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딴짓을 하면서 듣느라 잘 알아채지 못한 건지,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감독과 음악감독은 이 영화에 삽입되는 연주곡 넘버를 모두 피아노곡으로만 채웠다. (중략) 왜일까. 금속 현을 해머로 두드려서 내는 피아노 소리는 대표적인 차가운 사운드로 이 영화의 뜨거운 여름의 이미지와는 대조되는 것이다. 이글거리는 화면 위에 홀로 존재하는 피아노사운드는 고유의 청량함을 극대화하여 뽐내는 동시에 영화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중략) 에릭 사티, 모리스 라벨과 같이 20세기 초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음악을 일관되게 고른 것도 영화 특유의 낭만적이면서 몽환적인 무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출처 최다은 SBS라디오 PD,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 - 여름의 피아노, 씨네 21.)

 

 

전 곡을 순서대로 하나씩 듣다 보면 어느새 17번째 트랙이다. Visions of Gideon이다. 연주곡들이 지나가고 수프얀 스티븐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속삭이면 다른 곳에 집중하던 정신이 앗차 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럴 때면 손에 쥐고 있던 걸 잠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눌러주곤 했다. 특히, 이 음악에 대한 여러 글을 읽고 난 후엔 더 그렇다. 감히 딴짓할 수가 없다.

 

Gideon 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신의 계시를 받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신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곡의 제목 vision of Gideon은 기드온의 환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내용에 대입해보자면, 사라진 신은 올리버로, 기드온은 엘리오, 그리고 기드온의 환상은 엘리오의 환상 즉 환상같던 올리버와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 네이버 블로그 셸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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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사의 정점을 찍은 마지막 씬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울고 있는 엘리오의 얼굴, 모닥불. 그 장면 말하는 게 맞다. 이 장면은 절제, 덜 절제, 쏟아붓듯이 라는 각각 다른 지시로 총 세 번 촬영됐고 영화에 쓰인 건 두 번째 촬영분이라고 한다. 당시 티모시는 작은 이어폰을 끼고, 이 곡을 들으며 감정을 잡았다. Is it a video? 몇 주간의 이 사랑이 결국 환상인 건가요? 라고 끊임없이 되묻는 음악을 들으며 잡은 감정이라.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 윤희에게 OST



올해 2월에 봤다. 영화는 기차, 기차 밖 풍경 그리고 음악으로 시작한다. 그 장면이 좋았던 나는 영화를 보자마자 재생목록에 이 영화 사운드 트랙을 전곡 다 넣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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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X 김해원의 멤버이자 영화 음악감독인 김해원이 음악감독을 맡고, 유재하 가요제 출신 음악가 임주연이 작곡과 편곡에 참여했다.

 

 
“시나리오를 다 읽고,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엄청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 김해원
 

 

이 앨범에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음악만 있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나레이션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눈싸움 트랙은 김희애 배우와 김소혜 배우의 대화로 시작한다든가, 나도 네 꿈을 꿔 트랙은 ‘추신, 나도 네 꿈을 꿔’라는 극 중 마지막 대사로 시작한다든가. 아예 나레이션 만으로 이루어진 '편지 2 (Narr)'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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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을 들으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몇 개 있다. 사각거리는 쌓인 눈을 밟는 소리, 윤희와 새봄이 나란히 뒤뚱거리며 걸었던 것. 그 말을 할 때 윤희의 표정. 이 음악들은 들을수록 차분해진다. 윤희가 덤덤한 표정으로 쥰과 만났듯, 나도 그런 마음이 들며 괜히 한 번 턱을 괴게 되는 것이다.

 

윤희에게는 개봉과 함께 OST앨범을 발매했다. 이에 대해 감독은 ‘물성이 있는 결과물을 갖는 것에 욕심이 많다. 이것도 일종의 아날로그 취향일까. 어쩔 수없이 근대적인 인간 같다. 컴퓨터 파일보다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좋아서 특히 OST앨범은 영화 완성 전부터 제작사 대표에게 무조건 해달라고 졸랐다.’고 말했다. (출처 김소미, <윤희에게>임대형 감독 - 오타루에서 윤희가 코트를 입은 이유는, 씨네21.)

 

 

 

너는 왜 영화음악을 듣는 거야



누가 묻는다면.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왜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할 때 이 재생목록을 고집했던 걸까? 다른 음악들도 많은데 영화 사운드트랙앨범 전곡으로 꽉꽉 채워 넣는 이유가 무얼까? 앞서 자세히 다룬 세 앨범 외에도 ‘이터널 선샤인 OST’, ‘일 포스티노 OST’ 등등이 이 재생목록에 자리 잡고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OST'중 하나인 쿠루리의 wakare (이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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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집중을 하고 있을 때 듣는 재생목록이라 음악을 듣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귀에 틀어 놓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렇지만 그 음악을 듣는 순간이 있다. 열심히 집중하고 있다가 잠깐 끊겼을 때, 잠깐 쉬고 싶을 때. 손에 쥐고 있던 걸 내려놓고 보고 있던 걸 내려놓는 그때. 음악이 들린다. 그러면 피곤해서 감은 눈 너머로 영화의 장면이 펼쳐지곤 한다. 그 영화를 봤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다시 생각나기도 하고. 순간 감상에 젖는달까. 피로가 조금 풀린다.

 

김해원 음악감독의 인터뷰에서 좋은 글이 있어 가져왔다.

 

 

Q. 윤희에게 OST는 어떤 점을 특히 주의 깊게 들으면 좋을까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음악이 나왔던 장면과 각자가 영화를 감상한 날을 복기하며 들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음악이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개인의 기억들이 노래에 완전히 박제되는 것 같거든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당시의 기억이 재생되고, 감정이 되살아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앨범을 들으며 각자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셔도 좋아요. 원래 이미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영화음악에 이미지를 위한 빈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자기만의 이미지로 채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출처 melon, 차를 타고 어딘까 떠나고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노래, 브런치

 

 

영화음악을 듣는다는 것. 다른 뉴에이지라든가 클래식을 듣는 거랑은 불러일으키는 감상이 조금 다르다. Call me by your name 앨범 설명에는 ‘수프얀 스티븐스, 작곡 뿐 아니라 연주나 프로듀싱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그가 스토리가 존재하는 영화음악에도 동참했다.’라고 적혀있다. 스토리가 존재하는 영화음악,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음악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다른 음악들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붉은 돼지의 The bygone days (돌아갈 수 없는 날들, Kazumi tateishi trio ver)을 듣고 있다.

 

 



[우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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