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으로 사는 삶 [사람]

글 입력 2020.07.0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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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을 먹고 자란다.

 

누구나 오늘의 '나'를 일으켜 세울 추억 하나쯤 마음속에 품고 살 듯 나 역시도 그런 추억 몇 가지를 간직하며 오늘의 행복을 자주 빚지곤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듬고 추억한다.

 

나를 스쳐 지나는 찰나의 순간들이 가지는 힘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오늘까지도 가슴에 박혀 빛이 나고 있는 것일까? 너무 소중해서 먼지 쌓일 틈도 없이 자주 들여다보는 나의 기억 하나가 있다. 기억으로 사는 내 삶의 시작이 되어준 날이었다.

 

2017년 5월의 끝자락을 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래도록 그날의 하루를 잊지 못할 것이라는 내 생각대로 그날은 지금까지도 무너지는 나를 붙잡아주는 매우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주 화창했던 늦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서울의 공연장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몹시도 분주했고, 공연장에 도착해서는 나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심호흡만 여러 번 이어가며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내 생애 처음으로 잠실 주경기장에서 관람하게 된 공연이었는데 야외 공연장의 분위기가 여태 관람해왔던 돔 공연장과는 사뭇 달라 기대가 컸다. 더불어 그날은 단 이틀이면 끝나는 짧은 공연이었기에 시작도 전에 아쉬운 마음도 한가득이었다. 그 후 여러 가지 감정으로 복잡한 내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하고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공연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그러니까 'Cloud 9'이라는 곡의 무대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이곳은 어딘지, 꿈꾸던 곳
내가 내뱉는 숨이 흰 구름이 되고
너의 해맑은 눈빛이 하늘이 되고
끝없이 펼쳐진 파란 꿈결을 flying


 

그야말로 동화 같은 가사가 몽환적인 멜로디와 함께 날아와 머릿속에 꽂히는 그 순간,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분홍색이었고, 늦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객석에는 마치 하늘을 비춘 거울처럼 온통 분홍으로 물든 팬 라이트가 파도같이 넘실대고 있었고, 어느 한곳을 바라보는 수천 명의 사람이 하나같이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거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때의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이고 그림같이 보였다. 정확히 그 순간 나도 이런 꿈같은 풍경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에 없던 아주 강렬한 욕심이었다.

 

중간 과정이 많이 생략된 이야기지만 어쨌든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진로를 정하고 대중음악 공연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잊을 수 없이 충격적으로 아름다웠던 장면이었다. 지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날의 일기를 들춰보곤 한다. 행복했던 과거가 꼭 미련으로만 점철된 어떤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날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시는, 정말 두 번 다시는 그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 기억이 아주 생생해서 두 눈을 감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행복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경험이었으니까.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내 인생의 영화 같았던 그날, 그 순간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와 내일을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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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이후로 나는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잊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이석원 작가의 <실내 인간> 중 <마지막 순간> 속 한 구절이 곧잘 떠오른다.

 


사랑했던 사람의 냄새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인생에는 간직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날들을 영원까지는 아니어도 될 수 있는 한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역시 가장 최선은 '기록하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의 잠재의식을 건드릴 단 하나의 단어만 적어 두어도 그것이 나의 기억과 감정을 터뜨릴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아주 열심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나의 작은 역사는 잠이 오지 않고, 마음이 아주 엉망으로 물드는 날이면 펼쳐져 소설처럼 내게 읽히곤 한다.

 

늦은 밤, 그렇게 일기장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묘한 생각에 잠긴다. 내게 이런 날도 있었다니, 그리고 이게 모두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니 믿을 수 없다는 생각만 하릴없이 드는 것이다. 과거가 모이고 모여 오늘의 내가 되는 것이라지만, 이상하리만큼 현실감 없이 느껴진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마음이 오히려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서 날 스쳐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는 별 같은 추억이 박혀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는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 행복해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짝였던 오늘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내일의 나를 위로하는 것. 그렇게 수평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 모든 내가 스스로 연대하여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모두 끌어안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진가를 알아내는 것이 적어도 나를 보호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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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겪어보고 싶다. 그렇게 세상 곳곳에 나의 기억을 심어두고, 빛났던 순간이 간절해지는 날이면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기록하고 싶다.

 

그렇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내일의 나를 위해서 오늘 하루를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지낼 예정이다. 내가 지향하는 '기억으로 사는 삶'이란 과거에만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고, 단단한 현재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지를 표방하는 것이다.

 

하늘이 분홍으로 물드는 어느 평범한 날이라도 나는 기억 속 그날의 하늘을 올려다본 것처럼 아주 행복해질 것이다. 앞으로 나의 하루를 구성하는 아주 많은 것들에 저마다의 기억이 스며들도록 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기억을 먹고 자란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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