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생존을 위한 두 아이의 비밀 놀이 - 연극 '위대한 놀이'

글 입력 2020.07.0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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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좋은 연극을 보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 하나하나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와 닿아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막이 내린 후에도 머릿속은 적막한 무대 위 어딘가를 헤집는다.

 

연극 <위대한 놀이>의 무대에는 사실 그 어떤 정해진 형체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비어있었던 그곳은 연극이 이뤄지는 내내 결코 단 한번도 비어있지 않았다. 배우들이 오가고 대화하는 순간마다 수많은 공간과 장소가 탄생하고 사라졌다. 제법 넓고 매끈해보이는 무대 바닥은 연극이 끝날 즈음 피비린내를 풍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망가졌으며 그중에서도 아직 어렸던 두 아이의 마음은 짓이겨질 대로 짓이겨졌다.

 

연극으로 전쟁의 무서움을 알았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전쟁과는 또 달랐다. 허공을 맴도는 두 아이의 시선, 검게 빈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며 생존을 위한 놀이를 이어가는 두 아이의 몸짓은 아주 담담하고 일상적이었지만 바로 눈 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듯 소름끼치게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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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살아남기를 최우선에 둔 슬픈 놀이


 

도시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온 듯한 두 쌍둥이는 전쟁이 시작되고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마녀라고 소문난 미치광이 여자.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삶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키는 대로 어디서든 소변을 보고 입에 욕을 달고 살며 자신의 딸이 쌍둥이를 맡겼음에도 알하서 일하라고 할 뿐 전혀 돌봐주지 않는다. 이같은 환경에서 쌍둥이는 살아남기 위해 노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일만 하는 건 아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두 아이는 소중히 들고 온 아버지의 사전을 부여잡고 작은 낱말을 주워모아 머리를 키운다.

 

하지만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전쟁이 도래한 무질서의 세상을 견디기에는 너무도 힘겨웠다. 그래서 그들은 놀이를 한다. 존재를 모욕하는 거친 욕설을 감내하기 힘들어질 때면 서로에 귓가에 욕을 읊조리거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대뜸 욕하며 내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비단 말 뿐만이 아니라 폭력에도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에게 물리적 고통을 가하고 이를 인내하는 연습을 한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 어머니가 쌍둥이에게 늘 해주던 소중한 말들, 사랑한다는 말들을 떠올릴 때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런 과정을 겪어가는 쌍둥이는 점차 달라진다.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몸과 마음, 정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다. 배움을 놓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적는 것이다. 어떤 감정도, 생각도, 판단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보고 경험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온갖 사건들, 그리고 그러한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아이들의 태도. 이 역시 전쟁을 소화하기 위한 노력이었을까. 하지만 쌍둥이들이 사실만을 적는다면서도, 그들에게 닥쳐오는 괴로운 현실들은 정제해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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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폐함, 혹은 인간 본성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군상들


 

졸지에 시골 생활을 시작한 쌍둥이와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지나가며 비틀린 관계를 쌓는다. 그 누구도 정상적이지 않다. 그리고 쌍둥이들은 그 위태로운 사람들과 더없이 위태롭게 상호작용하며 자라난다. 모든 규칙이 무너진 전시 상황,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도 아까울 정도. 전쟁과 생존은 그저 끈적한 본능대로 살기 위한 하나의 변명일 뿐인 것처럼 여겨졌다.

 

옆집에 사는 어린 여자는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 속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짧은 온기라도 상관 없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개와 정을 통할지라도 그 순간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 그녀는 결국 전쟁이 끝난 날 군인들에게 희롱당해 처참하게 죽고 만다. 마을에 숨어지내고 있는 적군의 대장은 사실 성도착자다.

 

서로의 뺨을 때리며 고통에 익숙해지기 연습을 하고 있는 쌍둥이를 발견하곤 숙소로 데려와, 조용히 자신의 벨트를 풀어 건넨다. 때려달라는 말이다. 어느 날은 동네에 고운 천을 뒤집어쓴 신부의 시녀가 찾아온다. 아이들을 가엽게 여긴 그녀는 옷을 빨아준다는 명목으로 쌍둥이를 데려가 제 욕정을 풀고 은밀한 성행위를 가르친다.

 

다들 미친 전쟁 속에서 저마다의 놀이를 꾸리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더이상 도덕적 기준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게 됐다. 더욱이 피와 시체에 점점 익숙해진다. 믿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의 죽음까지 눈 앞에서 목격하고 그녀의 시체를 집안에 고이 모셔놓는다.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건 살아있는 몸뚱이나 시체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더니 덜컥 찾아온 아버지는 살아있는 지뢰 탐지기로 활용한다. 여기서 두 아이의 길이 갈린다. 아버지의 시체를 밟고 쌍둥이 중 한 형제는 국경을 넘어간다. 한 몸처럼 모든 경험과 감정, 생각까지 공유했던 형제는 그렇게 찢어졌다. 피에 젖은 전쟁이 어떤 식으로든 쌍둥이의 마음을 망가뜨리고 운명 역시 뒤바꾼 것이다.

 

무대 위에 펼쳐진 전쟁이 인간의 밑바닥을 보게 만들었다. 모든 규율이 박살나버린 판 위에서 인간의 본성이란 고작 이정도인가 실망스러웠다. 그저 꾸며낸 이야기이지 않냐고? 그렇다기엔 지나쳐온 긴 역사가 인간의 잔혹함을 증명한다. 더욱이 인간에게 성욕이란 대체 무엇인지. 동물에게는 차라리 삽입하고 흔들어 정액을 짜낼 뿐인 번식의 행위라면 머리를 쓸 줄 안다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다.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 그건 정말 다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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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넘나드는 유희의 끝, 연출


 

쌍둥이들이 펼치던 놀이, 미쳐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즐기던 놀이는 무대 위 정말 극적인 '놀이 장치'를 통해 배우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머리와 마음을 쭈뼛 서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엄청난 연출력을 통해 구현될 수 있었다. 연극은 텅 빈 공간과 테이프, 그리고 소리만을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히 테이프는 대사의 리듬에 맞춰 바닥에 화살표를 그림으로써 쌍둥이가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그어 평면적인 무대 위를 더없이 입체적인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폭탄을 맞는 장면에서는 그녀와 폭탄의 파편이 튀는 모습을 마치 화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팽팽한 테이프를 통해 묘사했다. 평면과 입체, 그리고 시간대마저 표현해내는 소재의 활용은 다같이 소꿉놀이를 하듯(물론 퀄리티는 소꿉놀이에 비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무대를 유희의 장으로써 즐기도록 만들었다. 이외에 스피커 통을 수레에 끌고 다녀 물소리나 동물 소리를 현장감 넘치게 표현하거나 배우들이 시시각각 다채로운 소리를 자아내 역할을 풍부하게 소화하는 등 그 자체로 볼거리가 넘쳤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무대 위의 놀이가 경계를 넘어 배우와 관객이 함께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 스토리나 연출이나 모두 잊을 수 없는 연극이었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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