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사막의 꽃

칼릴 지브란, '예언자' 25장, 미(美)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7.0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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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한 시인이 말했다. 

저희에게 미 美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어디서 미를 찾는가. 또 어떻게 미를 찾아낼 것인가. 미 그 스스로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미에 대해 말할 것인가. 미 그것이 그대들의 말을 엮지 않는다면?

 

괴로운 이와 상처받은 이는 말한다. `미란 친절하고 자비로운 것. 마치 자기만이 지닌 큰 축복이 약간은 부끄러운 젊은 어머니처럼, 미는 우리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열정적인 이는 말한다. `아니, 미란 힘차고 무서운 것. 마치 폭풍우처럼  미는 우리 발밑의 땅을 흔들고 머리 위의 하늘을 흔든다.`

 

지치고 피곤한 이는 말하기를, `미란 부드러운 속삭임. 미는 우리들 영혼 속에서만 말하지. 마치 그림자가 두려워 떠는 가느다란 빛처럼, 미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침묵에 따르며.`

 

하지만 불안한 이는 말한다. `우린 산속에서 미의 절규를 들었네. 그리고 그와 함께 말굽 소리, 날갯짓하는 소리, 또한 사자의 포효 소리도.`

 

밤이 오면 도시의 파수꾼은 말한다. `미는 새벽빛과 더불어 동녘에서 떠오르리라.` 그리고 대낮이 되면 노동자와 나그네는 말한다. `우린 아름다움이 황혼의 창으로부터 대지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걸 보았네.`

 

겨울이면 눈 속에 갇힌 이는 말한다. `봄이 오면 미는 언덕 위로 뛰어오르리라.` 또 여름 볕 아래서 곡식단을 베는 이는 말한다. `우린 미가 낙엽과 함께 춤추는 걸 보았지. 그 머리카락 사이로 눈발이 휘날리는 것도.`

 

이 모두는 그대들이 미에 대해 말하는 것. 하지만 그대들, 실은 미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루지 못한 욕구에 대해 말한 것일 뿐. 미는 욕구가 아니라 다만 황홀한 기쁨.

 

그것은 갈증에 타는 입술도 아니고 구걸하기 위하여 내민 빈손도 아니다. 오히려 불타는 가슴이며 매혹된 영혼이다. 그것은 그대들이 보았던 영상도 아니고, 그대들이 들었던 노래도 아니다.

 

오히려 두 눈을 감을지라도 보이는 영상이며 두 귀를 닫을지라도 들리는 노래. 그것은 주름진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 아니며, 날카로운 발톱에 매달린 날개도 아니다. 오히려 언제나 꽃 피어 있는 정원이며 언제나 날아다니는 천사의 무리.

 

오르팰레즈 시민들이여, 미란 거룩한 제 얼굴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 버린,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삶이며 또한 베일.

미는 홀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영원이면서 또한 거울인 것을……

 

- 칼릴 지브란, '예언자' 25장, 미에 대하여.

 

 

Q.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

 

A.

 

누군가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내게 묻는다면, 무엇을 말해볼 수 있을 것이고, 무엇을 나는 손에 담아 선보일 수나 있을는지. 다만 영원히, 온 정신인 우리 영혼이 그를 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사막에서도 꽃을 찾아내는 존재인 우리에게, 그 꽃은 무엇이었을까. 모래의 복판 쉬이 질 듯 위태론 자태를 흔들리며 전시하는, 그 꽃은 낙타의 입을 축이는 꽃이 아니고, 뱀이 볕을 쉬어갈 꽃 아니고, 벌이 찾을 꽃 아니고, 바람이 흔들 꽃도 아니인데, 그 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기에 이리도 보는 나를 흔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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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황량한 대지 위를 솟듯이 피어나는 작은 꽃들, 그 향연 같다. 언제고 눈 감아 ‘나의 공간’으로 들어오면, 그곳에는 검은 바다가 있고, 혹은 해가 진 사막의 언덕이 있고, 꽃 하나가 있다. 시나브로 짜인, 형상화된 내면 공간. 이 안에는 사철 검은 바다가 있거나, 해가 영영 찾지 않는 사막의 언덕이 있고,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의 초상이 있다. 그리고 꽃은 머얼리서 허상처럼 핀다. 검은 지평 위에 핀 불길한 유혹 같은, 눈부시게 빠알간 꽃. 혹은 사막의 언덕 머리에 핀, 달빛을 내쉬는 흰 꽃이. 그것은 아마 내 가진 아름다움의 비유된 형상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황량한 대지 위를 씨 없이 피어나는 작은 꽃들, 마치 천명 天命 같다. 높으신 누가 있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뜰히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게끔 하였는지. 사막에서도 꽃 하나를 발견하여야 쉬일 나를 느낀다. 그 곁에서나 잠을 청할 나, 아름다움은 마치 숙명 같다. 그를 찾는 내 모습이 그렇다.

 

드넓은 목초지, 풀 뜯을 넉넉한 공간만으로는 족할 수가 없던. 동물인 나는 늘 무언가 한 가지 더, 더욱 큰 무언가 하나를 찾아 나서게끔 짜인 갈증의 생명인가 싶다. 찾는 것은 무엇이었건 아름다움이다. 숙명 같은 갈증이 내게 있고, 그것은 오장 五臟이 편안한 때에도 자꾸 내게 쇄도하는, 그래 감각되지 않고서도 치미는 갈증인 영혼의 갈증이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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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향하도록 짜인 우리는 대지에 탑을 세운다. 그렇게 우리의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수 놓이고, 영원히 꿈꾸며 계속 탑을 세워 올리고 대지를 메워가다. 아름다움이라는 영원한 목표를 향해, 포기가 아니고서 끝이란 없을 ‘제작하는 손’을 안고 난 걸까.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고 있어야만 살 우리, 사실은 아름다움을 향한 영혼의 저 모를 매혹됨과 끝없을 다가감이 그것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간 혹은 종족이 소멸하는 때까지, 끊임없이 ‘각자의 더욱 아름다운 것’을 향해 보이지 않는 손을 뻗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자꾸, 이 손을 놀려 만들어야만 살 우리.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도구와 음식이고, 지식이요, 숫자이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이기까지 했다. 만드는 것은 이 손을 놀려 조립해낸 모든 것, 수렵도구와 저녁 식사에서 출발해 지금 우리의 사위를 가득 메운 이 모든 인간의 것들이다. 그런 한편, 또 우리가 손을 놀려 만들어내는 것 중의 하나로 드디어 예술이랄 게 있었다.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열렬한 찬미. 아름다움 그것만을 위하는 것이요, 그 영원히 달할 수 없는 것에 조금 나마 우리를 가까이하고자 쌓아 올리는, 제단이다.

 

그렇게 창조된 모든 인간의 산물 중 어떤 것은 긴 세대를 걸쳐 지나 현재에 닿은 것, 유산이라 불리는 것이 있고, 또 다른 많은 것들은 긴 시대 속의 순간만을 점유해 머물고 가는 것, 바람으로 화하여 지나버리는 것들이 있었다. 도구와 음식과 지식과 숫자가 그랬고, 예술이 또한 그렇다. 이 모든 산물이 모인 흔적인 역사는, 다만 인간이 자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사는 존재이며, 더욱 높은 것과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언제까지고 향하는 정신과 그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두 손이 우리 난 본질이라 말하는 듯하다. 이제 고개를 들어 나의 도시를 본다. 여기에는 지금 하늘로 더욱 높아가는 인간의 둥지 아래로, 그 곁 뻗어나는 지식의 상아탑과 무수한 인간의 도구들과 음식과 몇 예술이 있었다.

 

이 모두는 그대들이 미에 대해 말하는 것.

하지만 그대들, 실은 미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루지 못한 욕구에 대해 말한 것일 뿐. 

미는 욕구가 아니라 다만 황홀한 기쁨.

 

누군가는 구워지는 빵의 향기 속을, 또 누군가는 차츰 형성되어가는 창조의 형틀 앞을, 또 누군가는 글을 쓰며 사유하는 시간 속, 혹은 울리는 현이 내는 소리의 파도 속을, 이 모든 이들의 고유한 사랑과 그 사랑의 시간 속을 각자는 행복해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대하는 모든 사랑스런 시간 속을 이렇듯 가만 들여다보면, 우리의 이 수고로움이란 각자의 사랑에 대한 열렬한 숭배, 숭배의 과정 속에 가득 찬 사랑스런 시간을 흠향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나는 그 열렬한 사랑 이전에 ‘나의 아름다움’이 있었음을 슬며시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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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이미 안고 난 것. 발견은 사실, 발현의 문제이다. 누군가는 빵의 향기 속에서, 또 누군가는 현의 울음 속에서, 나는 문장이 짜여가는 느리고도 느린 시간의 속에서 사랑하였다. 사랑하였다. 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네 사랑이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왔니 묻노라면, 나는 어느 순간 그저 알게 되었다고 말하게 되다. 그 발견이 있곤 장차, 그 사랑에 바치는 열렬한 내 두 손의 수고로움이 약속처럼 있게 되었을 일일테고 말이다.

 

 

사랑은 어떻게 네게로 왔니

 

사랑은 어떻게 네게로 왔니?

햇살처럼 모았는지,

꽃눈밭처럼 왔는지,

기도처럼 왔는지?

말하렴

 

하늘에서 행복이 반짝이며 내려와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피어나는 나의 영혼에 매달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꿈의 왕관을 쓰고>(1896) 中


 

그 사랑에 어떤 조건이 필요했니 내게 묻노라면, 그것은 조건이 필요 없었기에 사랑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괴로운 이와 상처받은 이, 지치고 피곤한 이와 불안한 이, 도시의 파수꾼과 눈 속에 갇힌 이, 또 열정적인 이,’ 저 위 인용구 속 인물들이 제 각 힘차게 부르짖는 아름다움이란, 다만 가지지 못한 필요와 지금 없는 것들에 대함. 그러나 아름다움은 그런 것에서 제 이름자의 날개를 펴지 않는다 하신다. 아름다움이란 아마, 그 조건이 필요 없었던 것처럼 그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갈증 속에 피어난 찬미는, 해갈과 함께 스러지다. 그 찬미는 분명 느끼는 지금 더없이 사랑스러울 것이나, 곧 나를 스쳐 지나곤 스러지는 것.

 

“미는 욕구가 아니라 다만 황홀한 기쁨”

 

美, 아름다움은 그저 그렇게 짜인 것, 조건 없이 나의 숭배와 수고로움을 받을 무언가. 각자에게는 이고 난 사랑과 헌신의 대상, 美의 형상이 있다고 나는 오래 생각해왔다. 내가 가장 먼저 이 안에서 그리 느끼온 탓이다. 美는 내가 이고 난 나의 사랑, 그에 대해 나는 고이 여겨 숭배하고 열렬히 봉사하여도 보았다. 숭배자인 내가 그로써 받게 되는 것이 이제 황홀한 기쁨. 아니, 내가 그 기쁨을 알고 찾음으로써 ‘나의 美’를 숭배한 것일 게다.

 

오르팰레즈 시민들이여, 미란 거룩한 제 얼굴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 버린,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삶이며 또한 베일.

미는 홀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영원이면서 또한 거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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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아름다움은 베일을 걷은 삶의 “모습”.

 

그리고 너희인 우리가 바로 그 삶이자 베일이라 하신다. 삶이 내게 있고, 내게로부터 있으니, 내가 육신을 이끌어 시간으로 직조하는 이 삶이라는 것의 가장 진실한 ‘얼굴’이란, 아마 아름다움 속을 흠뻑 젖어 사는 나의 만개한 웃음일 것이다. 그 삶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사랑에의 회귀와 귀의함.

 

아름다움이란 내가 안고 태어난 어떤 사랑 그것으로 사는 때, 혹 그것으로 돌아온 때의 내 “모습”이라 하심이다. 그렇다면 美, 아름다움은 그런 자신의 본질 된 삶을 저 스스로가 느끼며 바야흐로 갖게 되는 감각과 표정. 그 감각이 짓는 내 모습이 바로 가장 여실하고도 진실한 표정, 더 이상 숨길 하등 까닭이 없어 해맑은 표정일 것이다. ‘미’는 이렇게 우리를 유도하여 우리를 피워내고,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일까.

 

그러나 또한 삶이 내게 있는 만큼 베일이 내게 있었으므로…… 그것은 이 ‘삶의 육신’에 가로놓인 것이자, 잠들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이것을 내가 보지 못하고, 나아가 스스로에게 가리고 있다는 말씀일 것이다. 두려움과 귀치 않음 나태와 다른 스쳐 지나갈 것들에 미혹됨과 조급함과 신경질적인 때때로의 우리 마음과…… 혹 아직 알지 못함. 눈 가리는 이 모든 마음에 의함일 것이고, 또한 미처 알지 못한 우리의 아직 앎에 말미암은 것일 게다. 그것이 나인 삶에 버금하는 나인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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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는 홀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

 

이 안고 태어난 사랑과 아름다움이란 아마, 영원토록 거기서 사라지지 않을 내 영혼의 주된 가지. 또한 영혼은 그 스스로를 언제나 굽어보고 있었으니, 나는 눈으로 보고 느끼는 자인 동시에 심안으로 느끼어 아는 존재. 영혼은 언제나 스스로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내게 알리었다. 그러므로 영혼은 제 스스로에게 거울이고, 또한 그 영혼은 이 거울에 자기 스스로마저 비춰 보임으로써 영원토록 응시한다. 그때 바라보는 영혼의 주가지 중 영원토록 잊히지 않는 것일 본질, 사랑과 아름다움은 자꾸만 내게 저를 알린다. 아주 머언 감각으로써 말이다.

 

잊고자 한들 잊어낼 수가 없던 것. 그것은 내 대낮의 의식이 분명토록 감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제고 밤이 되면 어딘가 의뭉스럽고도 쓸쓸한 감각으로써 자꾸만 내게 치밀었다. 본질인 아름다움은 홀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 우리는 아주 그것을 버릴 수도, 멀리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잊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별을 애써본들, 본질인 아름다움은 영원토록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디서 미를 찾는가. 또 어떻게 미를 찾아낼 것인가. 미 그 스스로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미에 대해 말할 것인가. 미 그것이 그대들의 말을 엮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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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내가 안고 태어난 어떤 사랑 그것으로 사는 때, 혹 그것으로 돌아온 때의 내 “모습”이라 하셨다. 美, 아름다움은 그런 자신의 본질 된 삶을 저 스스로가 느끼며 바야흐로 가지게 되는 감각과 표정. 그 감각이 짓는 내 모습이 바로 가장 여실하고도 진실한 표정, 더 이상 숨길 하등 까닭이 없어 해맑은 표정일 것이다. ‘미’는 이렇게 각자인 우리를 유도하여 우리를 피워내고,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일까.

 

오늘도 나의 사랑은 하나의 열매를 피워내라 내게 명하였고, 나는 받들어 두 손을 놀리었다. 나의 사랑은 다만 이런 것, 이 길고도 긴 글이고 그 이전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 마음이 장차 뻗어내 닿고픈 먼 곳에는 ‘예술’이라는 뜻 모를 단어가 자리해, 상상하는 지금 내게 찬란한 빛을 쏘이고 있었다.

 

무엇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지, 그 지난한 질문에 대해서 조금의 직감도 서지 아니한다. 내겐 아직, ‘아트인사이트’가 부족한 것일지도. 그러나 일단 그를 사랑하는 열렬한 마음과 일단 움직일 두 손만을 내가 가지고 있어, 여태 이곳, ‘아트인사이트’의 품에서 긴 글을 펼쳐 보였다. 그 모든 글은 전부 사랑을 통해 쓰여 나의 사랑이 되었다. 사랑으로 탄생해 다시 사랑이 되었다. 나는 아직은 뜻 모를 그것, ‘예술에 대한 통찰’을 향하여, 아마 그렇게 멀리서 다가가는 중일 것이다. 백지 100여 장을 훌쩍 넘긴 만큼, 딱 그만큼은 다가간 것일 게다.

 

글을 펼치는 마음은 스스로 족하다. 그리고 그 마음에 두 손은 기꺼이 봉사하고, 글은 나아가고, 그러다가 보면 일찍이 잠자고 있던 영역, 혹은 일찍이 생각지 못한 영역에 나는 도달한다. 인도되는 것이다. 글은 길게 호흡하며 멀리 뻗어나는 사유의 길, 글 씀은 돌다리를 놓으며 나아가는 사유의 행보. 쓰고, 확인하고, 밟고, 조금만큼 나아가는 일이었음을. 이 즐거운 체험을 겪었다. 겪음으로써 나는 이제 그를 조금만큼 더 알겠다.

 

마음과 두 손은 스스로를 제재로 스스로에서 출발하여 조금만큼은 멀리 뻗어 나간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그렇다면 생애도 이렇듯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며, 아직은 확인되지 않은 먼 마음과 직감에  유도되어, 두 손을 놀림으로써 베일을 통과하는 하나의 과정일까. 삶이란 그런 과정을 실현하는 육신, 이 마음과 두 손을 지칭하는 것이었을까.

 

아름다움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이 모든 일련을 일게 한 최초이자 아마 유일한 이유였고, 또 이 모든 일련의 끝에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 영원히 저 자신을 거울에 비치며 내게 알리는 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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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의 아름다움은 날더러, 더 아름다운 것을 쓸 수 있을 것이라며 나를 유혹하고 유도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고, 나는 내 손을 멈추기로 한다. 다음의 시간이 오면, 백지 위에 터지듯 쏟아 나올 나의 찬미를 잘 알겠기에. 또한 그때까지 이 안에서 응결되어 쌓이는 그 갈증이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더욱 열렬함으로 인도할 것임을 알겠기에. 아직, 내가 닿아야 할 곳이 멀고, 그러므로 이곳 아트인사이트에서 써내야만 할 글이 많다. 내 시간이 아직 남은 까닭이다.

 

아름다움은 나의 황량한 대지 위를 솟듯이 피어나는 작은 꽃, 사막의 꽃 같다. 언제나 내 안으로 눈 감아 들어오면 보이는 사막과 사막을 바라보는 나와 꽃. 그 꽃은 아마 내 가진 아름다움의 비유된 형상이었을 것이다. 그 꽃은 나를 보며, 또 나를 부르며 내 가진 사랑을 일깨우고, 그 사랑을 열렬히 빚으라 재촉한다. 그러면 나는 그 즐거운 고됨을 받들어 오늘도 어제도, 아마 내일까지도 그렇게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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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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