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낯선 환상, 강성은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 [도서]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의 환상은 어떤 모습일까
글 입력 2020.06.2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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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구름사진.jpg

 

 

의도했든 의도하지 삶은 커다란 변화가 연달아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대한 기대에 차 부푼 마음은 기분 좋은 상상이 되기도 한다. 삶은 반복적인 도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실패하는 일이 더 많을 때에도 그러한 상상은 계속된다.

 

강성은의 시에서는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기대에 부푼 기분 좋은 상상 대신 그와는 결을 달리하는 낯선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조금 이상한이라는 시집은 환상을 파고들면서 어떤 것을 보여줄까. 이 시집에는 일상의 삶을 슬쩍 비껴 간 낯선 환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침침한 불빛 아래 우리는 밤마다 또 무얼 그렇게 많이 고개를 끄덕이고 딱딱한 밤을 이빨로 물고 이가 좋지 않은 늙은이처럼 문득 우리가 태어난 그 밤을 떠올린다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29쪽 (밤을 까먹는 밤)

 

 

이 시에서는 밤 속에 든 죽은 벌레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며 결국에는 밤을 까먹는 자신들의 근원을 생각해본다.

 

그들이 태어났다는 사건은 밤을 이빨로 물고 고개를 움직이는,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행동들을 통해 증명된다. 밤 속에 든 벌레는 ‘밤’ 속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고 밤을 먹고 있는 이들도 그들이 태어난 ‘밤’을 생각한다니,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밤은 그들이 죽은 벌레와 같은 존재로, 언젠가 죽을 필멸적인 존재로 여기게 한다.

 

이 시의 벌레와 같이 ‘우리’는 죽어 밤 속 양분으로 다시 환원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벌레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에 태어난 자들은 겨울이 나눠주는 물을 먹고 

부러진 이 사이로 휘파람을 불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한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겨울의 시신을 천천히 혀로 녹여 먹었다

 

같은 책, 47쪽. (진눈깨비)

 

 

겨울의 시신을 먹음으로써 겨울에 태어난 자들은 겨울에게서 양분을 공급받는다. 앞선 시의 밤의 양분을 공급받은 벌레처럼 환원을 암시하는 행위가 먹고 자라는 행위이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는, 기우제 같은 제의 행위로 읽히는 이 장면은 환원, 즉 겨울의 시신을 먹는 것을 위한 준비 행위이다.

 

겨울의 시신을 머금음으로써 자신이 다시 겨울이 되고 다시 입을 벌리는 사람들의 몸을 구성할 준비가 되는 환상 속으로 들어간다. 겨울이 먹히듯 자신의 신체는 사라짐을 경험해야 환원이 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환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원과 환상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 환한 밤이 끝나면 다시 어두운 밤이 시작되리

밤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계절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한여름 밤의 노벨레

 

같은 책, 55쪽. (하지의 밤)

 

 

이 시에서 사람들은 긴긴 낮과 같은 밤이 지나 다시 어두워지면 다음 계절로 사라진다. 그들은 환한 밤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다시 어둠이 찾아올 것을 주지하고 있다.

 

이러한 밤 속에 몸을 담근 채 여행하는 이들은 계절을 건너 사라져간다. 사라지는 사람들에게 환한 빛에서 새카만 어둠으로의 환원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들은 그저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사라져갈 뿐이다. 시간이 흐르는 방향이 왜 여기에서 거기인지 묻는 것 만큼이나 당연하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밤 속에 갇혀 밤을 파먹으며 죽어간 벌레나 겨울의 시신을 먹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밤이 오기에 가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낯선 환상은 시 속 그들을 우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시간은 순환하고 있었다, 벌레가 죽기 전, 겨울에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 환한 밤이 시작되기 전에도 말이다. 신비하게도 이것은 규칙이 아니었고 하나의 사실이었다.

 

시간에 기생해 살아가는 생명들은 모두들 그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 시집은 낯설게만 보이는 환상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수연이다.jpg



[김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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