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이드의 황혼기

그 시절 오락실을 이끌었던 게임, 철권 시리즈.
글 입력 2020.06.2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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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9일, 그린게임랜드가 폐업했습니다. 그린게임랜드는 국내 아케이드 산업의 황혼기를 대표하는 오락실이었으며, 수많은 철권 고수들을 탄생시켜 외국의 게이머들까지 한 번쯤 들르게 만드는 매장이었습니다. 철권의 유명 프로게이머 무릎(배재민) 선수는 그린게임랜드의 폐업에 대해 이런 트윗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아케이드는 끝났다.’ 오늘 살펴볼 게임은 오락실의 황혼기를 이끌었으며 스스로 그것을 끝장내버린 바로 그 게임, 반다이 남코의 철권 시리즈입니다.

 

 

 

철권의 보급


 

국내에서 오락실은 전성기를 맞이했던 8~90년대를 지나며 점점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에는 오락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 싼 가격으로 고정되어 섣불리 올릴 수 없게 된 요금 등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가장 컸던 것은 역시 1998년 등장한 PC방의 존재 때문일 것입니다. 죽으면 바로 돈을 더 넣어 이어야 했기에 실제로는 한 시간에 수천 원을 쓸 수도 있던 오락실과 달리, PC방은 800원 정도만 내면 아무 걱정 없이 한 시간 동안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PC방에 가면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를 할 수 있었죠.

 

게임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게임들이 인기를끌긴 했지만, 주류였던 아케이드 산업의 게임들 대부분은 혼자 플레이하거나 옆자리의 친구와 협동하며 보스들을 물리치고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컴퓨터와 겨루는 것을 시시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유저들끼리 겨루는 것을 원했고, 대전격투게임은 그런 사람들의 입맛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죠. 심지어 싼 가격과 낮은 회전율에 골치가 아프던 오락실 점주들에게도 이것보다 회전율이 좋은 게임 장르는 없었습니다. 여러 대전격투게임들이 들어왔고, 그 중 몸값도 싸서 쉽게 구할 수 있던 게임 하나가 대박을 쳤습니다. 철권 태그였습니다.

한 번에 두 사람을 플레이할 수 있는 혁신적인 게임 스타일, 국적과 다양한 무술 종류, 심지어는 인간이 아닌 괴물들까지 플레이할 수 있는 넓은 스펙트럼. 철권 시리즈가 버추어 파이터의 아류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3D 대전격투게임의 대표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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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실뿐만 아니라 동네 문방구나 가게에도 오락기를 들여놓게 만든 명작, 철권 태그.

 

 

 

고수들의 등장과 TEKKEN CRASH


 

철권 시리즈는 이제 오락실들의 주요 매출을 담당하는 소위 ‘밥줄’이 되었습니다. 철권 4에서는 잠깐 주춤했지만 5 DR, 6 BR에서는 다시 상당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유저들이 철권 카드를 구매하여 자신의 아이디를 만들고 계급을 올리거나 캐릭터를 꾸미는 ‘철권넷’도 한 축을 담당했죠. 많은 오락실의 기기들이 기존 아케이드 게임에서 철권 기기로 교체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쯤 철권을 시작했던 유저들 중 하나입니다. 아직도 친구를 따라 처음 오락실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철권 기기에 동전을 올려놓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 밀집된 게임기들에서 나는 온갖 굉음과 기합소리. 꽤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에 열광했고 그런 사람들의 발길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고 실력과 계급은 몰라보게 쌓이고 있었죠. 대한민국에서도 철권 시리즈의 e스포츠 대회가 태동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위주의 게임 채널이었던 MBC GAME에서 그 시작을 알렸죠. TEKKEN CRASH(이하 텍크)가 출범했습니다. 초반에는 운영이 힘들었지만 인기를 끌며 시즌 3부터는 스폰서도 얻어 안정적인 리그 운영이 가능해졌습니다.

 

텍켄 크래쉬가 성공을 거두면서 소수의 철권 유저들만 알던 고수 유저들은 이제 유명인, ‘네임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한쿠마, 홀맨, 통발러브, 무릎, 잡다캐릭 등 수많은 네임드들에게 환호했고 그들이 다니는 오락실에는 그들과 게임을 한 판 해 보려는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네임드들은 그에 화답하여 한 오락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때로는 다른 지역의 오락실들도 찾아가 그 곳의 유저들과 겨루는 등 텍크의 성공은 철권의 성행에도 긍정적인 순환구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최대의 철권 중심 오락실인 서울의 그린게임랜드가 있었고, 그곳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철권 프로게이머들에게 전시용으로 임대받은 대회 트로피들이 그 위용을 빛내 주었죠. 철권 시리즈 하나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구조임에도 오락실들은 그 황혼기에 찬란하게 빛났고, 사람들은 이렇게 눈부신 이 황혼이 좀더 오래 빛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철권 최고의 프로게이머, 무릎 스페셜

 

 

 

곪아 터지다



 

 

철권계에서 유명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모르면 맞아야죠.’ 텍켄 크래쉬에서 나와 유행한 이 말은 대전격투게임의, 특히 철권의 고질적인 문제를 내포한 말이기도 합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가 쓰는 캐릭터의 기술들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죠. 각 기술들에는 고유의 발동 프레임(시간의 단위)과 막혔을 때의 손해 프레임, 이득 프레임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철권 같은 느린 템포의 3D 대전격투게임의 기본이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플레이하지 않을 캐릭터들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하는데, 철권은 그 캐릭터가 특히 너무 많았습니다.  철권 6 BR 기준으로 약 40여 개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3D 격투게임에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였고, 이는 높은 진입장벽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판 지면 바로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점도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컴퓨터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유저들을 상대하는 것이 재미있으니 유저들이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는데, 컴퓨터를 상대로 느긋하게 연습하고 싶던 초보 유저들에게는 이것이 연습할 시간마저 주지 않고 자리를 빼앗아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오래된 게임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고인물 현상으로 인해 신규 유입은 점차 줄어만 갔습니다.


유저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불안감이 싹틀 무렵, 철권 태그 2를 지나 철권 7이 출시되었습니다. 업주들은 철권 7의 새로운 기기들을 들여오는 데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태그 2가 예상 외의 흥행 부진을 겪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죠.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새로 구매해야 하는 기기 값이 감당하기 벅찼던 것도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오락실의 최대 주요 수입원이었던 철권 시리즈의 신작을 들여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많은 오락실들이 반쯤 매달리는 심정으로 철권 7 기기를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기기를 들여오고 나자 또다른 문제가 터졌습니다. 6 BR은 200원, 태그 2는 일련의 소동을 거쳐 300원으로 거의 고정되던 오락실 요금이 7에선 500원으로 책정되었기 때문이죠. 이 요금은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주 싼 가격에 속했지만 국내 유저들에게는 부당한 인플레이션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PC방 같은 경쟁 업계에서는 한 시간에 천 원 정도로 요금이 동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빨리 죽으면 채 5분도 즐기기 힘든 오락 한 판을 위해 500원이나 써야 한다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았으니까요. 유저가 눈에 띄게 줄어갔습니다. 게임을 온라인 매칭으로 바꾼 것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요소였으며, 국내 전체에 들어온 철권 7 기기가 280여 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온라인 대전의 의미를 퇴색시켰습니다.

이제 아케이드판 철권에게 남은 것은 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철권 7의 새로운 밸런스 업데이트들은 아케이드 기기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반다이 남코도 더 이상 돈이 되는 산업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대신 철권 7의 확장팩인 FR이 스팀을 통해 PC로도 플레이할 수 있게 유통되었습니다.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오락실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습니다. 살아남은 오락실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했죠. 오락실들은 이제 철권을 필두로 한 격투게임 위주에서 데이트 장소를 찾는 커플들을 위한 종합 게임장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리고 황혼기가 지나 찾아온 어둡고 긴 밤을 힘겹게 버텨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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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성지였던 그린게임랜드여 안녕.

 

 

 

그 시절을 추억하며


 

비록 위에는 철권 시리즈를 한국의 아케이드 산업을 끝장내버린 주범으로 여기는 것처럼 써 놓았지만, 그렇다고 철권 시리즈와 반다이 남코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미 아케이드판 철권은 그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으니, 이윤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케이드판 철권의 업데이트를 중지한 반다이 남코의 결정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철권 7 FR의 PC판 발매도 가만 있으면 망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최선의 활로를 찾은 결과물에 불과하죠. 그것이 결정타가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오락실들의 황혼기는 지나가고 없었으니까요. 또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싼 값에 중독되어 오락실의 처지는 신경쓰지 않고 요금의 인상에 반발했던 유저들? 진작에 제대로 뭉치지 못해서 요금이 기형적으로 싼 값에 동결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오락실 업주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입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저 시대가 변화하며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이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서로 이름과 나이는 모르면서 어떤 캐릭터를 어떻게 플레이하는지는 알던 그 시절, 인터넷을 뒤져 새로 연습하고 싶던 캐릭터의 기술표를 밤새 외우던 그 시절, 동전이 다 떨어져 가서 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게임을 플레이하던 그 시절을요. 힘든 세상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호쾌한 공중 콤보 한 방으로 날려버리는 재미가 있던 곳.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도전을 계속하게 만들었던 곳. 그 시절의 오락실은 우리의 쉼터였고 문화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지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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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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