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뜻은
반려 1 反戾/叛戾 [발ː려]
1. 명사 배반하여 돌아섬.
2. 명사 도리에 어긋남
놀랍게도 이러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반려’의 뜻은 ‘짝이 되는 동무’이다.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생김새의 단어가 이토록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꼭 태어날 때부터 고독한 존재인 우리가 어떤 존재와 ‘짝’을 이루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일이라는 것 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반려를 찾고 만드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나누고 교감할 상대를 필요로 하며 관심을 갈구한다. 이 반려라는 관계를 시각화하여 표현한다면 마치 찰흙으로 만들어진 두 존재가 서로의 일부를 떼어 섞은 다음, 그 혼합물을 나누어 다시 자신의 몸에 붙이는 그러한 형태가 아닐까. 우리는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타 존재와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이렇게 무거운 ‘반려’라는 단어는 과거의 의미에서 탈피하여 동식물들에게도 쓰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람과의 소통을 뛰어넘어 동식물과도 감정을 나누고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일까? 아니다. 소통 능력의 발전으로 인한 관계 확장이 아닌, 기존 소통 대상과의 결핍으로 인한 관계 확장이다. 동식물과의 교감이라니, 당신은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든 해보지 않았든, 상상만으로도 평화롭고도 위로를 받는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아름다운 관계로 여겨지는 것은 음성으로서의 대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대화는 관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기도 하고, 불행의 끝으로 떨어지게도 만든다, 대화가 부재하는 우리와 반려 동식물과의 관계는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는 이상 온전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더 지능적인 존재라는 것이고, 우리의 의도가 그들에게 이기적이고도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동식물을 좋아하고, 그러한 존재와의 교감을 꿈꾸고, 그러한 내용이 담긴 영상을 자주 찾아보며 미소 짓는다. 그런데 동식물에 대한 이런 나의 애정이 훗날 우리가 말하는 반려의 관계로 이어졌을 때, 그것이 진정한 반려의 관계를 맺기 위한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내가 그 소중하고 예쁜 존재를 소유하고 만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지 명확히 정의하기 힘들 것 같다. 물론 어떤 착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길에 버려져 있거나 죽어가는 존재를 거두어 기르는 것은 정말 서로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그리고 집이라는 거주 공간을 공유하며 삶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스스로 또는 주변인과 미디어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
어떠한 존재와도 온전한 영혼의 일치, 교감을 이루기는 힘들다. 더하여 말하자면, 사람 대 사람을 넘어 사람 대 타 존재와의 교감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보다 타 존재가 더 하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동등하고 소중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다른 존재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힘을 가지고 있는 강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 그것을 전제하고 우리와 동식물과의 반려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어떻게 하면 이 관계를 서로에게 더욱 반려의 존재 다운 관계로 발전시키고 존속하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