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연극 [공연예술]

한 겨울 밤의 꿈
글 입력 2020.06.2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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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취학 아동 시절, 지역문화센터에서 언니와 함께 어린이 연극을 본 이후로 처음 보는 연극이다. 제대로 연극을 본 적도 없으면서 극은 나에게 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분류되었다. 유튜브 영상이든, 드라마든, 말투든, 옷차림새든 작위적인 것은 쉽게 지탄받는다. 연극하면 으레 연상되는 운율과 발음이 명확히 살아있는 또렷한 말투부터가 늘 말끝을 흐리거나 얼버무리는 나에게는 왜 이렇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던 건지.

 

게다가 봐야하는 연극이 위대하고도 아득한, 무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나를 한층 더 긴장되게 만들었다. 그렇게 추위로 경직된 발걸음을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겼다. 몇몇 보이는 아는 얼굴들에 괜스레 마음이 풀어지는 시점에 두 배우가 무대 위에서 관람 시 유의사항 등 연극 외적인 것들을 연기를 주고받으며 안내했다. 관객이 귀담아 듣지 않을 법한 것들에 집중시키는 탁월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꿈의 초입이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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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내가 자발적으로 극의 절대성이 깨지는 순간을 발견하고,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티타니아의 요정과 퍽이 어린 소년을 두고 벌어진 오베론과 티타니아 사이의 싸움 경위를 길게 설명할 때 묘한 어색함을 받았다. 내 입장에서는 그 설명이 좀 길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시간의 단일성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희곡을 읽어오면서 극의 절대성이 지켜지지 않아도 충분히 극은 성립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렇게 공연을 통해 삼단일 법칙의 훼손을 목격하니 왜 ‘극의 위기’라고 일컬어졌는지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시점에는 관객과 배우들과 무대와 함께 몰입하여 꾸고 있던 꿈에서 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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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연극이 연극임을 인지하는 시점은 있었는데, 배우들의 직업의식이 엿보일 때였다. 나는 책이나 영화에서도 작가가 내밀히 숨겨놓은 사소한 장치를 발견하고 흐뭇해하는 버릇이 있다. 아무래도 이  때문에 극 내용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하고 배우를 배우로서 바라본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지만, 연극과 배우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런 부주의도 초보 관객인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허미아를 비롯한 네 사람이 서로 싸우는 장면에서 인물들의 옷이 벗겨졌었다. 그들은 모두 살구색 내의를 입고 있었는데 드미트리우스와 라이샌더의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CF 모델을 병행하는 TV 배우들로 직업의 존재를 알게 된 터라, 배우란 타고난 멋진 외양 덕에 커리어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멋진 미소에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치기 어린 시기심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러나 드미트리우스와 라이샌더의 땀자국으로 나는 ‘배우’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단번에 바로 고칠 수 있었다. 그들은 인물 형상을 무대 위에서 구현해내는 일을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행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일에 열정적으로 투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묘하게 느껴지는 신뢰감과 기특함이 땀자국을 보는 순간 분명해졌다. 나 또한 수업을 위해 연극을 준비하면서 느끼지 않았겠는가. 10분 내내 또박또박 발성하는 것조차 무척 지난한 과정이었다. 애정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꾸준히 해낼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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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삼화 연출의 《한여름 밤의 꿈》이 내가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나는 지점은 극중극을 준비하는 인물들이 생선장수, 오토바이 배달원, 급식 아주머니 등 그야말로 ‘한국형 서민’이라는 것이다. 아테네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초자연적인 요괴 세상과는 더더욱 연관 없어 보이는 한국 사회의 애환 서린 서민들은 이 연극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참 난감했다.

 

기존 《한여름 밤의 꿈》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극을 보다 깊이 이해해야겠다는 욕구가 강박으로 작용했고 그 덕에 내 배경지식을 주어진 상황으로 착각해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결국 국립극단 홈페이지에서 문삼화 연출가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야 실마리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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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노엘 패턴(1821~1901)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다툼(1849)>

 

 

나는 ‘셰익스피어’라는 거창하고도 아득한, 그 이름에 낭만 희극 특유의 시적이고 운율이 강한 대사를 상상하며 연극을 보기 전부터 작품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삼화 연출가는 이런 우려를 포착해 1막 1장과 2장의 위치를 바꾸고, 한국의 노동자들로 연극을 시작하여 현대적 감수성을 확보했다. 관람 시 주의사항을 듣던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경험을 ‘꿈꿨다’고 표현할 만큼  관객으로 물들여진 것도 연출이 의도한 세심한 때문일 것이다. 또 이렇게 극을 시작한 덕에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그리고 요즘 유행에 다소 맞지 않는 숭고한 사랑은 본래 《한 여름 밤의 꿈》에서 차지하는 중심적인 위치에서 조금 밀려나는 듯하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준비한 연극을 올리기 위해 귀족의 결혼식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들이 크고 작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연기와 연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성심껏 준비한 연극은 권력자의 취향에 의해 번번이 방해 받는다. 노동자들은 지원금을 탈 목적으로 공연을 준비했기 때문에, 변덕스러운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하며 즉각 연기와 연출을 수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그들이 지원금을 타고자 했던 근본적인 동기는 아무 걱정 않고 그들이 사랑하는 연극을 순수하게 하고 싶은 마음, 즉 연극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 그들에게 극의 완성도에 관계없이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킬 때에만 은화를 흩뿌리는 행위는 폭력이었다. 예술 행위에 정당한 형태의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것은 노동법을 인지하고 있는 나에게, 그 행위를 전혀 존중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은화가 큰 소리를 내며 무대 위를 뒹구는 동안 극중극을 하던 배우들의 얼굴에서는 정색과 미시감이 섬세히 피어올랐다. 그 정도로 일단락된 것은 노동자라면 고용인의 쓴 소리와 고객의 불평불만쯤은 웃는 낯으로 수용하는 버릇이 체화해야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처럼 극이 끝나가는 동안 《한여름 밤의 꿈》에 느끼는 시대적 거리감은 줄어들고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접할 때면 낡은 것에 대한 편견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에 흠뻑 빠져들어 쉽게 공감하거나 열광하곤 한다. 이것이 지나치게 단순하기는 하지만, 내가 나의 사전에서 정의내린 ‘동시대성’이다. 고전을 새로 읽고자 했던 문삼화 연출가의 의도에 힘입어, 이 작품에서 취업불안에 특화된 나의 감각으로 동시대성을 경험한 것이다. 이 덕분에 달빛 아래서 대판 소동을 벌이는 어지러운 결말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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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0년대 카프 작품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을 때면 늘 개탄을 하고 난뒤 난감함을 느낀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를 거쳐, 2010년대까지 세상의 부조리한 원리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와중에, 이 선명하고 오랜 문제 대상을 앞두고도 나는 적극적으로 해결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자책감은 달이 주는 환상적인 느낌 아래에서 조금 덜어진다.

 

신비롭고 오묘한 분위기 아래서 함께 이성이 흐려진 노동자와 귀족과 포로가 된 여왕은 한 데 섞여 각자가 가지고 있던 불만과 억압과 울분을 몸으로써 표출한다. 이 난동을 통해 계급 격차가 해소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순간 감정과 원한을 털어버리고 다시 억센 현실을 살아나갈 상쾌한 원동력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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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지켜보는 나도 관객이었기에 감정의 정화를 체험하며, 나름대로 지난한 삶의 과정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게 된 듯하다. 비록 퍽의 갈무리 대사와 함께 나는 꿈에서 깨 한겨울의 거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강렬한 꿈을 꿔본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상적인 꿈에서 느낀 감정은 각인되어 실제 사건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이 감상문을 쓰고 있는 나의 용기와 피로도를 곰곰이 생각해볼 때 나는 12월 13일 오후 7시 30분에 꽤 강렬한 꿈을 꿨던 것 같다.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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