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희롱과 풍자의 차이, '해나 개즈비: 나의 더글러스' [TV/드라마]

글 입력 2020.06.1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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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국의 개그 프로그램에 관한 소논문을 쓰며 주된 개그 소재와 그것을 웃음으로 실현하는 과정을 살펴본 적이 있다. 소재는 익숙했다. 사회에서 실제로 희롱의 대상이 되는 집단을 소재로 한 개그가 차고 넘쳤다. 친근한 고정관념의 이행은 관객들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매주 일요일 밤, 그릇에 한가득 쏟아 놓은 과자와 함께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주말의 마지막 순간을 즐기던 나 또한 그런 유형의 개그를 자연스럽게 소비하고 재생산해온 장본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시절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여러 분야의 발전에 목을 매고 달려드는 우리 사회이다. 이제 그 대상에 인권과 사회의식을 포함할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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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아래로의 희롱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의 풍자. 이러한 웃음의 니즈를 채워주는 콘텐츠는 많지 않다. 수요와 인재가 증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공급원은 귀를 막은 채 우뚝 서있다. 그런 와중 보게 된 해나 개즈비(Hannah Gadsby)의 스탠드 업 코미디는 간지러운 곳을 마구 긁어줬다. 그의 넷플릭스 첫 작품,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는 대중의 갈증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 그의 다음 작품인 <해나 개즈비: 나의 더글러스>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현 사회의 축이 남성 중심적 사고로 형성되고 유지된 사회임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해나 개즈비는 이러한 사회의 가부장적 시선을 증명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로 남성의 시각에서 이름 지어진 어떤 단어를 꼽는다. 한글로는 직장 자궁 오목이라고 불리는 여성의 신체 부위. 이는 영어로 ‘Pouch of Douglas’, 직역하자면 더글러스의 주머니라는 뜻이다. 여성의 성기임에도 남성의 이름을 따 그의 주머니라는 이름을 붙인 기이함에 해나 개즈비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본다. 만약 세상이 여성중심적 사고로 흘러갔다면? 남성의 신체 부위를 발견한 여성 학자가 그의 성기를 ‘Karen’s handful’(캐런의 한 줌)이라고 지었다면?

 

여기서 해나 개즈비가 가정한 여성 학자의 이름이 캐런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한다. 캐런은 외국에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여성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혜지’(게임 실력이 낮은 여성을 통칭하는 이름), ‘김 여사’(운전 실력이 낮은 여성을 통칭하는 단어) 등과 같은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여성일 경우에만 사용되는 이런 단어는 행동의 자체나 그 경위보다도 성별을 강조한다. 그리고 실제 수치와는 별개로, 그런 행동의 주체가 주로 여성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퍼트린다. 특히 여성들에게 더 가해지는 이러한 악질적 프레임은 그가 이어서 들려주는 해프닝에서도 적용된다.

 

여성의학과에서 처방해 준 약이 부작용으로 해나에게 자살 충동을 일으켰기에 해당 약의 처방을 거부했건만, 남의사는 자신의 말을 듣는 편이 신상에 좋을 것이라며 고집을 부린 것이다. 심각한 부작용을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해나와 그를 이해하지 않는 남의사는 언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해나의 분노가 ‘호르몬’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논리적인 의견의 교류가 아닌 맥락 없는 입막음의 수단. 그 수단인 단어들이 형성한 프레임은 개인들을 일반화하며 그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킨다. 여러 성별에게서 나타나는 부도덕하거나 미달되는 행위의 주체가 여성일 경우 그 원인을 다른 특성이 아닌 성별에만 두어 강조하는 것. 그러면서도 실제로 본질적인 원인이 성별의 차이에 있는 문제들에 있어서는 일반화를 부정하는 것. 이러한 현상은 해나 개즈비의 첫 작품을 보고 악플을 쏟아낸 네티즌들에게서 또한 나타났다.


 

"제 지난 공연 '나의 이야기'는 많은 이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이라고 했지만 사실 다 남자예요. 물론 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았어요! #NOTALLMAN(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님)이라는 해시태그를 쓰는 남자들만 그랬죠. 그분들만요"

 

 

해당 ‘악플러’들은 해나 개즈비의 작품이 웃기지 않다며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나 개즈비의 개그는 웃음으로 포장된 화살이 사회적 소수자가 아닌 기득권자를 향한다. 그간 공격의 객체가 되기보다 주체가 된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 소수자들의 반격은 (그것이 마침내 행해진 작고 희미한 것일지라도)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성숙도의 차이는 난생처음으로 과녁에 고정된 이후에 있으며, 이는 해나 개즈비의 용감한 역류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반격이 충격적이라면, 경험을 바탕으로 공격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이를 반격이 아닌 공격으로 치부하여 기존의 공격을 강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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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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