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끝도 모르고 달리는 어느 두 사람 [영화]

영화 [델마와 루이스]
글 입력 2020.06.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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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제로 어떤 글을 적어야 할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았던 이번 주. 올해 상반기에 보았던 영화 리스트를 쭉 살펴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멈추었다. [델마와 루이스].

 

비교적 접근이 어렵지 않은 다른 90년대 영화와 달리 [델마와 루이스]는 그 어느 사이트에서도 영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추천하던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봤던 것인지, 정말 본 것이 맞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올 3월, '인생 영화 기획전'이라는 이름으로 CGV에서 재개봉을 했더라지. 당시 상영관이 얼마 없어서 편도로 1시간을 달려 영화를 보았다.

 

문학에서는 인상 깊은 첫 구절이 중요하듯 영화는 끝맺음이 중요하다. 엔딩이 유난히 좋다고 느끼는 영화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영화다. 스크린이 희게 물들며 엔딩. 극과 극 사이에서 정확히 가운데에 서서 중심을 잡는 느낌이었다. 평소엔 거들떠보지 않던 크레딧까지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깊은 여운이 남았다.

 

그 여운이 더위에 녹아내린 몸을 컴퓨터 앞으로 안내했다. 써야 할 글이 생겼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찾았다. 이제 현실을 판타지처럼 만든 두 여성, 델마와 루이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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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델마와 루이스가 차 끌고 놀다 오려다가 졸지에 범죄자가 된 내용이다. 변화의 시발점은 한 발의 총성이었다. 이는 루이스가 한 남자에게 겨누었던 총을 겁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 결과였다. 감정이 섞인 우발적인 행동이었지만 후회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다고 본다. 오히려 친구인 델마를 정말 아끼고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게 남자는 술에 취한 델마를 꼬드겨내어 강제로 자신의 성적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루이스가 나타나서 남자를 꾸짖었지만, 남자의 태도는 뻔뻔했다. 아무런 저의 없이 한 것에 루이스가 과한 반응을 보인다는 듯이 오히려 루이스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뉘앙스였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뭐든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고. 남자는 루이스가 절대 자신을 쏘지 못하리라고 얕보는 바람에, 게다가 자신의 잘못조차 인지 못 하는 무지함 때문에 가볍게 입을 놀렸다. 마지막 유언이 될 줄 알았다면 남자는 조금 더 성의를 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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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기점으로 델마와 루이스는 살인 용의자, 도망자 신세가 된다. 거침없이 앞으로 달리는 오픈카에 몸을 실었던 그들은 온갖 곳을 누비며 변화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델마가 바뀌는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드러난다.

 

델마의 남편은 가부장적이다. 폭력적이고, 델마를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고, 무시한다. 그래서 루이스가 놀러 가자는 제안에 델마는 남편에게 물어볼 용기도 내지 못한다.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질문 하나 하기 위해서 용기까지 내야 한다는 점에서 델마가 여태껏 겪은 수모가 드러났다. 그런데 델마는 소심하면서도 대범하다. 남편에게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쪽지와 인스턴트 음식 하나만 남긴 채로 루이스의 차에 올랐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행이 끝나고 닥쳐올 후폭풍은 제쳐놓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이 존재하는 이상 해야 하는 사람.

 

이때 델마는 새하얀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은 맑고, 쾌활하고, 순진하고, 사람을 잘 믿고, 겁이 많던 델마를 그대로 드러내는 색이다. 초반에는 루이스가 먹고 쉴 공간을 마련하고, 멕시코로 가기 위한 돈을 찾고, 패닉에 빠진 델마를 보살핀 데다가 운전까지 도맡았다. 델마가 하는 일이라곤 앉아서 루이스가 차리는 상을 받아먹는 일뿐이라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루이스의 심정이 무척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델마를 보호하고, 도와주고, 함께 하려는 것일까. 루이스는 강했고, 델마는 약했다. 루이스 혼자였다면 모든 일이 탄탄대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이 의문은 영화의 중반부에 풀렸다. 델마가 자신의 잘못으로 멕시코로 가기 위한 돈을 몽땅 날렸을 무렵이다. 잘못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사람을 믿은 것 자체가 교정이 필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나쁜 것은 젊은 남자였다. 델마를 유혹하고 델마가 잠든 새에 돈 봉투를 들고 도망간 남자. 차 없는 남자를 태워준 것도, 잘 곳 없는 남자를 재워준 것도 모두 델마의 선행이었는데 은혜를 그런 식으로 갚으리라곤 델마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 일로 패닉에 빠진 사람은 신기하게도 루이스였다. 내내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로 중심을 잡아주던 루이스는 한순간에 주저앉는다. 그 돈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무얼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는 사실에 암담했을 거다. 도망간 남자가 아니라 그 돈을 델마에게 맡긴 자신을 탓했을지도 모른다. 이때 영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사람은 델마다. 하얀 원피스에 머리를 풀어헤쳤던 델마는 질끈 묶은 머리와 청바지 차림으로 바뀐다. 그리고 놀라운 결과를 만든다. 젊은 남자가 '은행 터는 법'이라고 알려준 방법 그대로, 상점을 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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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에 잡힌 델마의 모습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 허술함이 상점 주인이나 손님들에겐 공포로 다가왔을 것 같기도 하다. 전혀 조심성 없이 총을 쥔 저 손이 실수로 방아쇠라도 당기진 않을까 하며. 영화 초반에 잔뜩 긴장해서 두 손으로 총을 겨눈 루이스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거다. 델마가 저렇게 당당한 강도질을 할 줄은.

 

멕시코로 갈 돈까지 챙긴 그들은 다시 길을 달린다. 물론 경찰이 가만 있을 리는 없다. 살인에 강도죄까지 얹어진 그들을 바짝 쫓는다. 잡힐 듯 말듯 레이스가 이어지다가 그들은 절벽과 경찰차 사이에 갇힌다. 루이스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암울해지고 만다. 그러나 델마가 루이스의 손을 붙잡으며, '우리 절대 잡히지 말자'는 말에 반짝,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그리고 액셀을 밟는다. 절벽 끝으로 뛰어든 그들의 모습과 하얗게 점멸하는 스크린. 검정이 아닌 하얀색은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 같았다.

 

결말이 주는 시각적인 효과는 좋았지만, 결말 자체에는 딱히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죽음은 곧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이고, 이 표현만큼 델마와 루이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다. 자유롭게 누비던 두 사람에게 정해진 결론으로 묶어두기도 싫다. 이제야 깨달았다. 루이스가 강하고 델마는 약한 것이 아니라 둘 다 강하고 약하다. 사람이라면 으레 그러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솔직하고 대범하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움츠러들고 작아진다. 혹은 그 반대거나.

 

둘은 정반대 같으면서도 비슷하다. 루이스는 '현실적'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사람으로 치환한 캐릭터다. 침착하고, 계산이 빠르고, 계획적이다. 이 단어의 약점은 '변수'다. 미리 계획했던 것에서 상황이 틀어지거나 완전히 뒤바뀌면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멈춰 선다. 이 현실을 보완하는 것이 '이상적'인 캐릭터, 델마다. 긍정적이고 기발하지만 때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아이디어를 낸다. 불가능해 보이는 델마의 생각을 루이스가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면서 둘은 좋은 친구이자 파트너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끝도 모르고 달리던 델마와 루이스. 그 무모함이 주는 에너지야말로 이 영화를 빛내는 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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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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