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시없을 멋진 고집쟁이들에게 전하는 감사와 찬사, 연극 - '팜Farm'

글 입력 2020.06.1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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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이 슈와 김정 연출가의 일대일 협업


 

아트인사이트에 업로드되는 수많은 리뷰 속에서 나의 글을 한 번 읽어본 사람이라면, 어떤 누군가는 작가를 먼저 소개하고 리뷰를 쓴다는 인상을 받은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그런 글은 내가 썼다. 그리고 구글이 제 기능을 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떤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먼저 작가를 소개하는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예술가는 자기혁신에 몰두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개인이 가진 독특한 특질은 변주될 뿐, 결코 변형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이기 이전, 한 개인이 만든 작품에는 늘 어떤 공통점이 존재하게 된다. 이 작품 역시 전작의 설명과 시놉시스에서 어떤 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 난해한 작품의 해석을 위해, 전작의 정보를 끌어와 해석의 근거로 삼아보려 한다.

 

작가 마츠이 슈는 도쿄에서 출생해 96년 배우로 입단한 후, 작가 겸 연출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7년 <칼로리의 소비>로 극단 '샘플'을 창단하여 청년단에서 독립했다. 마츠이 슈의 짤막한 커리어를 읽다 보면, '연극의 실험자', 혹은 '연극계의 아방가르드맨'이라는 감상이 절로 튀어나온다. 앞서 언급한 <칼로리의 소비>는 각기 다른 자신만의 지도를 들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현실과 허구, 물건과 남성, 남성과 여성, 배우와 관객 등 온갖 관계의 경계선을 의심하고 뒤넘어서고 뒤섞는 연극적 실험을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지하실>에서는 사이비 종교로 사람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표현했으며, <시프트>는 강한 투견을 만들기 위해 근친상간 교배를 하는 것을 인간으로 대입해 표현하고 있다.

 

극장에서 나누어 중 번역가의 말을 보태어 보자면, 마츠이 슈는 기괴한 소재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작가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이런 소재들은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세계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냉소 섞인 실험은 이미 여러차례 검증받은 바 있다. 2011년 <자랑스러운 아들>은 제 55회 기시다 희곡상을 수상하였으며, 2016년 <이륙> 으로 대만의 kauandu arts festival에, 2018년 자기 집에 국가를 세우고 망명자를 받는 은둔형 외톨이의 이야기를 다룬 <자랑스러운 아들>로프랑스의 festival d' Automne a paris에 참가했다.

 

내가 전작들을 감상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앞선 설명과 뚜렷한 공통점을 가진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온갖 '그로테스크한 소재', 젠더와 자아, 물건과 사물, 심지어 관객과 배우를 넘나드는 '무경계성'이 그렇다. 하지만 전작과 비교해 마츠이 슈의 담담한 어조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김정 연출가의 전작을 감상하고 기대한 나로서는 이것이 김정 연출가와의 협업의 결과라고 추론했다. 전작의 사진을 찾아보니, 온갖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이 작품과 대조적으로, 마츠이가 연출을 맡은 팜은 침착하고 차가워보이는 색감으로 표현되었다.

 

앞선 문장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한국에서 초연된 작품이 아니다. 팜은 2019년 10월 페스티벌 도쿄(FESTIVAL/TOKYO)에서 동시대 아시아 예술계의 다양한 실험을 선도하는 일본 최대의 국제공연예술제에서 이미 초연된 바 있다. 페스티벌 도쿄의 디렉터 겸 예술감독 카쿠 나카시마와 연출가 김정은 2018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처의 감각>을 계기로 만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긴 고민 끝에 카쿠는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고독과 도시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계속해 온 작가 마츠이 슈의 <팜(Farm)>을 제안했다.

 

페스티벌 도쿄 디렉터가 본 <처의 감각>이 계기가 되어, <팜>이라는 새로운 작품이 제안된 것처럼, 나도 이 작품에서 <처의 감각>을 떠올렸다. 내가 감상한 처의감각은 신화와 현실, 무대와 관객석,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끊임없이 목표로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근원이다. 배우들은 춤추고, 조금 분절된 언어로 이야기한다. 비슷한 두 작품이지만 내 감상의 결이 뭐라 말하기 어려울만큼 이질적이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의 감각>은 어떤 외로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이 작품, <팜>은 외로움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배우들이 입은 화려한 옷이나, 무작위로 내밀어 지는 개그는 오히려 이 작품의 어두움을 깊게 들이마시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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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의지가 살아있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난해하고 그로테스크한-은 내 취향에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도, 작품 스틸샷의 키치한 이미지와 2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은 <처의 감각>의 여운 때문이었다. 나는 난해한 비유를 썩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감상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물론 비문학이라 해서 모두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기술된 것은 아니고, 일부 철학책에서는 설득력 없이 현학적인 표현에 어떤 매스꺼움을 느끼곤 한다. 요약하자면, 나는 작품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드는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한 소재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리지널리티를 지향하는 소재를 일반적으로 선호하지만, 그만큼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는 편이다. 자극적인 소재에만 초점을 두다보면, 관람객의 관심끌기만 남게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극적인 소재 속에서 뚜렷한 메시지나 표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술가의 역량에 맡겨진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끊임없이 뻔한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아야지만 감동을 준다.

 

하지만 사실 어쩌구 저쩌구 써놨지만, 자신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한 결과가 그 작품이라면 이런 기준은 별 의미가 없다. 작품에서 예술가의 진실된 목소리가 포착되는 순간, 형식이나 기준은 힘을 잃는다. 관람객이 예술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고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쏟았던 헌신과 고민의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 개인적인 잣대를 이 작품에 들이대 보자면 아래와 같다. 내 잣대에 따르면, <팜>의 소재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연출의 힘과 맞물려 나름대로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내 안에서 이 작품은 분명 '좋은 작품'에 포함된다.

 

반복해서 기술했듯이, <팜>은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극의 구조와 그로테스크한 소재가 맞물려, 관람객들을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분 상태에 돌입하게 한다. 이런 끔찍한 모호함 속에서 배우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배우들의 전달하는 몸짓은 문명 이전, 인간의 본질 자체가 가진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내가 앞서 붙여 놓은 메가톤맨의 짤은 관람객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의 감상은 '뭔지는 잘 모르지만 뭔가 대단한 의지가 살아있는 것 같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썩 좋은 작품'을 만난 내가 이 리뷰에서 이러한 결론을 이르게 된 과정을 공유해보려 한다. 내가 앞으로 써내려가려는 글의 이정표를 제시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우선, 이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만한 혼란스러움에 내가 느낀 아쉬움에 대해서 먼저 기술하려 한다. 나는 이 작품을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크게 세 개가 있다고 본다. 첫번째, 서사의 혼란스러운 전개방식, 두번째, 너무 많은 언어의 혼재, 세번째, 과장된 그로테스크함. 그렇다면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 작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이유에 대해서 기술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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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떠오르는 인간 소외


 

 

<팜>은 오렌지의 엄마가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맥락상 엄마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아빠는 과학자로의 삶에 몰두해 가족을 외면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부부는 오렌지를 사랑한다. 엄마는 오렌지를 보통아이로서 키우고 싶어하고, 오렌지를 하나의 연구대상으로 보는 아빠조차도 극 내내 죄책감을 표현한다. 최고의 카레 파티를 꿈꾸던 사랑스러운 부부가 이토록 남들만도 못한 사이가 된 것은, 그들의 아들인 오렌지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 인간'인 팜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보다 빠르게 성장하며, 성욕이 없고, 어떤 장기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부부는 단순히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란다는 소망으로 유전자에 손을 댔었다. 하지만 아이가 손 쓸 수 없는 과학기술의 결과로 느껴지는 시점에서 결국 분열하고 만다. 오렌지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갈등의 원인이자 과학기술의 대상으로서 죽어간다. 엄마와 아빠는 모두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오렌지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렌지는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존재하며, 부부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를 하나의 도구로 다룬다. 사실 이 과정에서 오렌지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오렌지는 천천히 움직이고, 산더미같은 장난감을 무덤의 흙처럼 덮고 쓰러질 뿐이다.

 

오렌지는 과학 기술의 결과로써, 철저하게 착취당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오렌지가 하나의 도구로 착취당하는 과정은, 그 안에 온갖 장기가 들어찼다는 표현보다 그의 동생과 새로운 인류를 통해 끔찍하게 그려진다. 그의 동생은 아빠가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든 아이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온갖 장기를 다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인류로서의 '팜'들은 머리 없이 태어난 철저한 도구들이다. 동생과 그의 종족은 사랑없이 태어난 인간이며, 철저하게 도구로서 취급된다. 처음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치로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했던 오렌지는 자신이 철저한 도구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끔찍한 고독감에 시달린다.

 

오렌지가 인간으로 서는 것은 연극이 거의 끝나갈 때 쯤이다. 오렌지가 암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서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떠난 후에야 오렌지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는 마담에게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달라고 이야기한다. 오렌지는 자기도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고 싶다고 말하고, 마담에게 자신의 동생으로 만든 뼈를 삽입해달라고 부탁한다. 기괴한 섹스 장면의 마지막, 양 팔을 허우적거리는 오렌지는 그제야 느리게 움직이던 제 속도를 찾는다. 동생의 뼈가 합치되었을 때, 그는 이 기괴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어떤 소속감과 사랑을 느낀다.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 극에서 오렌지가 가장 인간다운 장면이 이 장면이다. 동생을 배양한 뼈는 물건이지만, 결코 그에게는 물건이 아니다. 마치 오렌지가 물건처럼 대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오렌지가 죽은 후, 남은 사람들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오렌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케이타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두 부부는 만나지 않는 시계바늘처럼 빙글빙글 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어쩌면 죄책감을 느낀 두 부부의 모습은 포스트잇을 떼고, 줍는 장면에 이어 처량하기 짝이없다. 남같은 삶을 사는 이들은 오렌지가 죽은 후에야 서로를 기다려주고 함께 걸어간다. 오렌지를 묻은 장난감 무더기에 각각의 사람들이 얼굴을 파묻고, 극이 내린다.



여기까지가 이 연극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텍스트로 옮기니 서사나 세계관도 명확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제 연극에서는 연극이 시간 순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연극을 나오면서 연극의 내용을 정리하느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대충 중요한 사건들을 기술하는 식이, '이혼 요구-팜으로서의 오렌지-내연남과의 관계-내연남과 마담의 은밀한 관계-내연남 문제로 인한 갈등-신혼 부부의 달콤한 시절-오렌지의 탄생 기원'... 이런 식이다. 한번 본 연극이어서 정확히 이 순서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시간대가 혼란스럽다는 것은 이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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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의 언어는 여러가지 언어가 섞여있다. 이 연극에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몸짓언어가 함께 표현된다. 작 중에서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도 각국의 노래가 섞여있다. 뒤의 스크린을 보느라, 배우들의 말을 들어보느라 관람객은 혼수상태에 빠지기에 이른다. 이렇듯 서사가 뒤죽박죽으로 제시되고 언어도 여러가지 혼합되어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혼란은 등장인물들에 있다.

 

예컨대 어머니는 상냥하고 내연남과 잠자리를 하지 않고 아빠를 배신하지 않으려는 모습과, 어딘가 냉혹한 구석이 있고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함께 표현된다. 아버지는 냉혹하고 싸늘한 연구자의 모습과, 아내를 떠나보내지 않으려하 고 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묘사를 함께 표현한다. 우유부단하고 허세가 있지만, 색정광에 진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내연남도 혼란스럽다. 부부의 세계 뺨치는 이 세 명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마담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묘사의 결정체다.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은 마담은, 사기꾼이자 구원자, 환상과 현실,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기묘한 존재다. 오렌지는 그저 반들거리는 머리 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로 표현된다.

 

이런 혼란스러움은 아마 감독에 의해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런 혼란스러운 전개와 묘사는 앞서 감독에 관해 기술했던 것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연극'의 실험 중 하나로 보인다. 사실 나는 이 연극에서 어떤 고집스러움을 느꼈다. 관객과 쉽게 소통하려기보다는, 정말 그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강한 욕구가 느껴졌다. 그리고 나라는 관객에게 그러한 시도는 성공적인 편이었지만, 나와 함께 간 관람자는 서사의 혼란스러움과 자극적인 소재로 몹시 힘들어했다. 나 역시도, 이 연극이 특별히 어떤 글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해하려는 시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여기서 읽은 것들은 대부분 '강한 자극으로 인한 반작용'정도로만 읽혔을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소재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 나 역시도 이 표현 면에 있어서는 다소 불만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극에서 다루고 있는 그로테스크함을 과장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트인사이트에서 감상한 연극인 <누구의 꽃밭>, <하거도>와 같은 작품도 처절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소재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작품들보다 더 수위가 높은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단순히 잔인하고 야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있는 소재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사실 이렇게까지 과장해서 표현할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아마 이는 오렌지의 절실한 심리가 자세히 묘사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쇼'로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연극을 감상하는 당시에 이 모든 그로테스크한 소재를 이해할 증거와 소화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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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없을 멋진 고집쟁이들에게 보내는 감사와 찬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연극에서 어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 연극이 결코 단순히 끔찍한 내용을 다룬 연극이 아니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연극 내용과 적절하게 엮이는 연출의 매력과 배우의 몸짓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정말, 두 예술가의 완벽한 화음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소재에 놓칠 수 있지만, 마츠이 슈가 완성한 각본에서 드러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등장인물의 세부설정은 하나의 연극으로 다루기가 아까울 정도로 섬세하다.

 

섬세하게 뿌려놓았으나 처음에 분열되어 움직이던 등장인물들은 결국 거대한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달려간다. 무마츠이 슈의 말대로, 이 극의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특정 가족이 아니라 인류 보편화된 이슈다. <팜>은 말그대로 과학 기술과 인간, 혼란스러운 인간의 삶을 소름끼칠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배우들은 과장스러운 옷을 입고 과장된 몸짓을 하지만, 판타지에 머물지 않는다. 연극의 몇몇 장면은 그 당시보다는, 그 후에 계속 떠올라 괜히 마음을 눅눅하게 만든다. 그건 앞서 말했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라기보다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다.

 

이런 세계를 연극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것은 김정 연출가의 몫이었다. 안무가의 섬세한 지도에 따라 완성한 그들의 움직임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삶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배우들의 과장되고 역동적인 움직임은 <처의 감각>에서도 느꼈던 생동감과 인간 근원의 충동을 떠올리게했다. 앞서 말했듯 수많은 언어와 서사가 꼬인 이 작품이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배우들의 움직임에 있다.

 

마츠이 슈가 한국에게 보낸 글대로, 코로나 19사태로, 모든 인간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지만, 촘촘하게 세워진 관객석을 필요로하는 연극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미래과학 기술에서 발생된 소외를 다루고, 자연스럽게 춤추는 배우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한-일관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언어를 인간의 움직임으로 집약하여 통일하였다. 관람객 석 사이사이에 앉아있는 인형은 코로나19 사태를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느껴졌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작품이 관람객들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다는 것도 이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당초 코로나사태, 한-일관계의 갈등으로 떠들썩한 시대에 묵묵히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쌩 고집쟁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이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참 의미있는 일이다. 나아가, 이 작품에서 완성한 예술가의 고집이 문화예술계의 비석으로 남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팜 포스터.jpg


 


 
 
팜 Farm
- 2020 극단 프로젝트 내친김에 -


일자 : 2020.06.05 ~ 2020.06.14

시간
평일 8시
주말 3시
월 공연 없음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제작

프로젝트 내친김에

 

협력

페스티벌 도쿄 (FESTIVAL/TOKYO)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120분

 




극단 프로젝트 내친김에
 
[프로젝트 내친김에]는 2014년 결성된 젊은 연극인 집단입니다.
 
[프로젝트 내친김에]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자 모인 배우, 연출, 작가, 스텝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프로젝트 내친김에]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무대언어를 찾고자 합니다.
 
[프로젝트 내친김에]는 진실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은 모든 작업자들과 함께 합니다.
 
[프로젝트 내친김에]는 연극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강렬한 체험의 순간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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