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캐릭터를 만드는 작가라면 한 번쯤 접할 만한 - 트라우마 사전 [도서]

트라우마를 요목조목 살펴보기
글 입력 2020.06.0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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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생활을 즐기는 방법은 무수히 많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은 단연 영화 관람일 것이다. 나 또한 '보편적'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를 자주 즐긴다. 종합예술품이라고 불리는 이 매체에 매력을 느낀다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이 이끈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만나고, 사건을 마주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참을 다투다가 어떤 결론으로 수렴한다. 주인공을 필두로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은 꼭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의 삶을 닮았다. 이렇듯 이야기는 곧 사람이기에 하나의 극을 끝까지 끌고 가려면 어떤 존재를 내세울지 정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그 '어떤'을 이야기의 흐름에 맞도록 어떻게 조합하느냐다.

 

이럴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참고서 같은 책이 있다. 책 제목부터 남다른, 『트라우마 사전』. '사전'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구성 또한 일반적인 책과 다르다. 저자의 서문이 무려 100페이지이다. 그 뒤로는 트라우마를 배신, 범죄 피해, 사회적 부정의와 개인적 고난, 실패와 실수, 어린 시절의 특정한 상처, 예기치 못한 불상사, 장애와 미관 손상이라는 7가지의 큰 테마로 나누고, 챕터마다 하위 항목이 가지 치듯 정리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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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실수'라는 4번째 챕터에 'ㄱ: 공적인 실수, 과실 치사, 극심한 중압감. ㄴ: 낙제. ㄷ: 대규모 인명 피해에 대한 책임, 또래 압력에 굴복하다.' 등 구체적인 상황이 사전처럼 나열된다. 각 소주제는 똑같은 구성을 따른다. 여러 구체적인 상황-훼손당하는 욕구-생길 수 있는 잘못된 믿음-가질 수 있는 두려움-가능한 반응과 결과-형성될 수 있는 성격-상처가 나빠질 수 있는 계기-상처를 직면하고 극복할 기회. 즉 어떤 사건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반응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한다. 물론 무조건 따라야 할 정답은 아니다. 저자가 말했듯 책은 모든 것을 담지 못한다.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다.

 

어린 시절 학대당한 캐릭터, 보육원에서 자란 캐릭터, 가족에게서 배신을 당한 캐릭터 등 상처 입은 캐릭터를 내세워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풍성하게 꾸려갈지 고민하는 창작자들에게 꽤 도움이 될 내용이다. 특별히 짚어내는 독창적인 포인트는 없지마는 이렇게 한 곳에 '트라우마'라는 주요 키워드로 캐릭터를 정리한 책이 있을까 싶다. 캐릭터 구상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전개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느낄 때 참고서처럼 쓰기에 딱 좋지 않을까.

 

또한, 복선이나 숨겨진 의미 파악 등 영화를 더 깊게 이해하고자 캐릭터를 분석할 때에도 이 책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극심한 변화를 겪은 캐릭터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한 영화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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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로 점철된 니나의 발레


 

영화 [블랙 스완]은 발레 [백조의 호수]의 프리마돈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발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니나가 점차 자신의 내면에 매몰되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그렸다. 니나가 탐낸 그 역할은 밝고 순수한 백조와 어둡고 은밀한 흑조를 동시에 소화해야 한다.

 

평소 순종적이고 얌전한 니나는 백조를 완벽하게 소화했지만, 흑조로서는 부족하다며 늘 단장에게 지적받았다. 사실 지적이라기보다 도 넘은 무례함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니나는 발레단의 최고 자리를 얻고 싶은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옭아매던 어려움을 이겨낸 듯했다. 그러나 '완벽'이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자신을 깊은 구렁텅이에 내몰고 만다.

 

니나가 이런 결과를 맞는 데에는 세 가지 트라우마가 있다고 본다. 아쉽게도 하나는 책에서 따로 다루지 않았다. 바로 엄마의 꼭두각시처럼 개인의 의지와 모조리 짓밟힌 삶이다. 니나의 어머니는 발레를 아주 좋아했지만 니나가 생기는 바람에 관두어야 했다. 포기는 아니었다. 니나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앞세웠으니 말이다.

 

니나는 개인의 의지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분홍색과 레이스로 가득한, 어린아이 방이라고 해야 더 자연스러울 취향은 니나의 것이 아니다. 니나를 피터팬처럼 영원히 어린아이로 여기는 어머니는, 자신처럼 되지 않도록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 발레를 포기할 만한 사건이 생기지 않게. 자신의 몸 상태도 눈으로 확인하고 관리하는 어머니를 당연한 일상인 듯 받아들이는 니나. 또, 발레단에서 발생한 모든 소식을 항상 바로 어머니에게 알린다. 스파이가 보스에게 보고하듯.

 

프리마돈나가 되고 싶은 니나의 욕망은 니나의 것이 아니다. 니나가 종종 여러 면의 거울 앞에서 스트레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울은 니나의 방이 아닌 어머니와 함께 쓰는 공간, 거실에 있다. 그리고 거울에 반사된 니나 주위엔 어머니가 있다. 거울 속 인물은 니나 이지만, 니나가 아닌 셈이다. 모두 어머니의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주변인의 기대'라는 트라우마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앞서 말한 주변인의 기대는 챕터 5 어린 시절의 특정한 상처에서 '대중의 시선을 받으며 자라다' 대목과 연결 지을 만 하다. 니나는 친구 하나 없이 어머니와 발레가 인생의 전부였으므로 어머니가 곧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을 날카롭게 비판할 대중이기도 하다.

 

 

구체적 상황

부모 중 한 명이 유명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였다.

 

훼손 당하는 욕구

안전과 안정, 애정과 소속감, 존중과 인정, 자아실현

 

생길 수 있는 믿음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내가 유명한 내 가족처럼 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유명하기 때문에 모두가 내가 실패하기를 원한다.

명성이 없다면 나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가질 수 있는 두려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을 실망하게 할 것이다.

 

가능한 반응과 결과들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데 집착한다.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

자신을 위한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쓴다.

더 크고, 훌륭하고, 위험한 것에만 재미를 느낀다.

맡은 배역을 연기하다 보니 자신이 누군지 잊는다.

 

형성될 수 있는 성격 특성

속성 적응하는, 협조적인, 규율 잡힌, 상냥한, 내성적인, 성실한

단점 의존적인, 강박적인, 방어적인

 

 

어머니의 대리인이라는 인지조차 못 한 채, 자신의 욕망인 줄 알았던 어머니의 기대에 충족된 사람이 되고자 강박에 사로잡혔던 니나. 심한 강박과 불안에 니나는 현실과 상상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피가 날 정도로 등을 벅벅 긁는다거나 손톱 옆의 여린 살을 자해하듯 뜯는다거나 했던 장면은 꿈인지, 실제인지 니나도 알 수 없다. 실체 없는 존재에 의해 완성된 '완벽'은 추락의 다른 말이었다.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니나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환상에 산다.

 

 

 

'트라우마'가 주는 의미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정환경이 완벽한 자는 없다. 태생부터 결점을 가진 인간은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세계를 경험하고, 몰랐던 것을 배운다. 과정은 아주 고되다. 자신이 가진 결점 때문에 해를 입기도 하고, 알지 못했던 결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결점이 생기기도 한다. 결점은 마주하기가 고통스러울수록 결점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좋은 것은 전시하고 부족한 점은 숨기기 급급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은 안다. 결점을 깊은 곳에 묻어두고 못 본 척 해봤자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컴컴한 곳에 둘수록 뿌리가 썩어들어 가 좋은 점까지 그 어둠으로 물들일지 모른다.

 

영화 속 인물의 아픔과 극복 과정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다. 저마다 가진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지, 아니 나아질 수는 있는지, 조언이나 자극을 얻을 수 있는지. 물론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러한 메시지 기능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 성장하는 모습에 뭉클함을 느끼는 건 비슷한 이유일 거다. 쳐다보기도 싫은 어려움을 마주한 용기,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의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 어느 하나 쉽지 않은 과정을 이겨낸 캐릭터가 얼마나 뿌듯한가. 왠지 모를 희망 하나도 자라난다. 나도 해낼 수 있다고.

 

트라우마 사전이라는 책에 눈길이 간 것도 같은 이유다. 영화 속 인물을 파악하는 데에서 나아가 내가 맞닥뜨린 어려움을 인지하고, 실제로 도움을 얻고자 했다. 물론 이 책은 정답이 아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인간은 저마다 다른 선택과 다른 결정을 내리니까. 그래서 방향 표지판 정도로 삼으려 한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반응이 잘못된 게 아니라 얼마나 자연스러웠던 것인지.

 

트라우마 사전으로 이따금 내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며, 훗날의 나를 위한 글을 마친다.

 

 


 

 

트라우마 사전

작가를 위한 캐릭터 창조 가이드

 

 

트라우마 사전_표지 입체.jpg

 


지은이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옮긴이

임상훈


분야

글쓰기, 창작 작법

 

펴낸곳

윌북


발행일

2020년 4월 20일


면수

508


판형

152 * 220


정가

22,000원


ISBN

979-11-5581-266-2[03600]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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