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짝사랑 연대기] 3장 : 하루에 20분, 글 ‘무조건 많이’ 쓰기

'일단 많이 쓰기'의 중요성
글 입력 2020.06.0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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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 내려 가는 힘, 필력


 

최근 소설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합평 중에 인상 깊은 말씀이 있었다.

 


해윤이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지기만 하면, 한 큐에 쭉 쓸 수 있는 사람이야.



한 마디로 ‘필력’이 있다는 평을 받은 것이다. 칭찬이라면 물론 다 좋지만, 나는 특히 필력에 관한 칭찬을 받으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게 있다. 왜냐하면 필력은 내가 노력으로 일군 것이라고 나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필력이 늘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 자만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소설의 기-승-전-결에 대한 콘티가 다 짜여있다는 전제 하에, 만자 정도는 이틀 안에 써낼 수 있다.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것이 가능하게 한, 내가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꾸준히 해온 일에 대해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1학년 때, 시 수업에서 내준 과제


 

1학년 때 들었던 시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특이한 과제를 내주셨다. 매일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20분씩 ‘아무 말’을 쓰라는 것이었다. 일기도 아니고, 짧은 단편 글도 아니고 왜 교수님은 ‘아무 말’을 쓰라고 하신 것일까?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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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제는 ‘정제된’ 글을 쓰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무조건 많이’ 쓰는 것이 목표이기에 오히려 정제된 글을 쓰지 말라고 하셨다. 일기나 소설을 써오라고 하면, 다들 고민하느라 몇 장 못 쓴다는 것이었다. 펜을 쥔 이후에는 의식의 흐름대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실타래 뽑아내듯이 쓰라고 했다.

 


아 뭐 쓰지?

할 말이 없는데?

교수님은 뭐 이런 과제를 내주셨담…….



이런 생각마저도 다 쓰라고 하셨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바로바로 쓰되 중요한 건 20분 내내 최대한 많은 문장을 쓰는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장을 써 내려가는 힘은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일단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것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난 이제 이게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무조건 많이' 쓰기의 중요성


 

인상적으로 들은 실험의 내용이 있다. 사진을 가르치는 교수가 학생들을 A 그룹, B 그룹으로 나눈 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과제를 내주셨다고 한다. A 그룹에게는 최대한 사진을 많이 찍은 뒤 그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제출하라고 했고 B 그룹에는 가장 최고의 사진이 나올 수 있을 때 딱 한 장을 찍은 뒤 그 사진을 제출하라고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A 그룹에서 훨씬 좋은 사진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 정말 ‘아무 말 대잔치’를 썼다. 1학기 동안만 내주신 과제였지만, 그때의 나는 하루에 20분 아무 말 쓰기가 아주 좋은 습관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과제를 검사받고 난 뒤에도 3학년 때까지 이렇게 매일매일 아무 말 대잔치를 쓰는 걸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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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부터 3학년까지 매일 쓴 노트들

 


하루에 20분은 어떻게 보면 짧고 쉽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주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동할 때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적거나, 도서관에서 근로를 할 때 20분 동안 수첩에 아무 말을 끄적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일상이 자연스럽게 지나갈수록, 다 쓴 노트들은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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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분씩 어떤 말이라도,

아무 말이라도 일단 써 내려갔다.

 


아무 말이라고 해도, 실은 멋진 문장을 쓴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진짜 얼마나 아무 말을 썼는지 보여주기 위해 한 부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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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의식의 흐름

 

 

"오늘 나는 행운아인 것 같다. 아 맞다 붕어빵을 안 먹었어...ㅠㅠ학교 가는 길에 삼각김밥 사먹어야지. 그래도 이거 빼면 진짜 행운아다. 14분에 미친듯이 달렸는데 딱 잡아가지구ㅠㅠㅠㅠ 신호등이 한 신호가 더 늦었더라면 ㅠㅠㅠㅠ 늦었을텐데 딱 안 늦는 라인까지 잡아서 타가지고 너무 좋아."

 

지금 읽어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붕어빵? 신호등?


 

 

문장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진다.


 

배구 만화 「하이큐」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코치가 주인공에게 평소에 공을 계속 만지고 몸에서 떨어트리지 말라고 한다. 공의 감촉과 그립감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을 매일 20분씩 쓰는 일도 나에게 이와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문장을 20분씩 매일매일 막힘없이 쓰다 보니 나는 문장을 쓰는 일에 대해 조금은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또한 가장 크게 도움이 된 점은 이 행동들이 쌓이면서, 하나의 신념이 내 몸에 새겨진 것이었다. 바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쓸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었다. 내 노트들엔, ‘단지 그때 아무튼 썼기에’ 지금의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아이디어나 감수성이 있었다. 만약 애초에 쓰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것들이었다. 그 노트에 쓰여있는 문장들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미래의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충분히 고칠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이 글쓰기를 하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천재 만화가라고 해서 처음부터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위에 눈 코 입을 그려 색채 단계로 가는 사람은 없다. 일단 슥슥 – 선을 잡는 스케치 단계가 존재한다. 나는 글을 쓰는 것도 이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첫 시작을 하는 문장부터 끝까지 가독성 좋고, 비문이 없고 표현까지 완벽한 문장은 쓸 수 없다. 일단 가독성이 좋지 않고, 비문투성이에 엉망진창이라도 ‘쓰는 것’이 중요했다. 끝까지 다 쓰고 읽으면 생각보다 내가 나쁘지 않게 썼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고치는 건 빈 화면에 새로 쓰는 것보다 좀 더 쉬운 일이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일부러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문장을 일단 써내보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 노트를 쓰듯이 두려움에 머뭇거리기보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일단 적어내려가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일단 쓰면 된다는 믿음


 

‘일단 쓰면 된다. 고치는 게 더 쉽다.’ 이걸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그 믿음이 내 몸에 체화되어 있는 건 달랐다. 그 믿음 덕에 나는 첫 중편 소설 두 편을 마감하는 데 성공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동생들의 선물로 소설을 써야 할 때였다. 두 동생들과 나이차가 꽤 나는 편이라 판타지 소설을 써줬는데, 한 사람당 A4 기준 60페이지 정도 되는 소설을 완성했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노트를 쓴 경험을 바탕으로 진도를 최대한 빼는 것에 집중했다. 안 풀린다고 멈추면 영원히 미완의 소설이 되었다. 나는 정말 안 써지는 날에는 썰을 풀 듯이 음슴체로 썼다. 예를 들면 이렇게.

 


그래서 A가 B한테 공격을 휘둘렀음. B는 당황했음. 얘가 나한테 이럴 리 없는데?



허접한 문장을 쓰는 건 고통스러워도, 만화가들도 걸작을 그리기 전에 스케치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쉬운 문장으로 써서 진도를 많이 빼두는 걸 목표로 한다. 그리고 미래의 내가 보면 이걸 다시 읽었을 때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A는 B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칼을 그의 목 쪽으로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그 움직임을 피한 B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서렸다. ‘A가 어떻게 우리를 배신할 수가...!’



처음부터 저렇게 정제된 문장으로 쓰는 건 어려운 일이고 굉장한 스트레스를 요하는 일이다. 부담감에 시작 자체를 하기 어렵거나 도중에 그만두기 쉽다. 그래, 결론은 아무리 허접하고 별거 아닌 것 같더라도 ‘일단’ 쓰는 것이다. 그 일단 쓰는 걸 매일매일 하면, 미래의 나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문장을 드라마틱 하게 탁월하게 잘 쓰게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장들을 써 내려갈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들에 근육이 붙게 되는 느낌이다.


 

 

부담 갖지 말고, 그저 매일매일


 

1학년 때 과제 설명을 들었을 땐 엉뚱한 과제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교수님 말씀대로, 결국 그게 옳은 거였다. 그냥, 매일매일 쓰는 것. 그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너무 큰 부담감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 이걸로 어떤 큰 성취를 해내리라! 생각을 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나는 그냥 숨 쉬듯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하기도 하고, 공부하기 싫을 때 20분 동안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수첩에 끄적거렸다.

 

글은 매일매일, 내 엉망진창인 문장투성이의 사랑고백을 받아줬다.

 

내 고백이 완벽하고 심금을 울리는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매일매일’ 말을 건 것에 마음이 끌렸을 거라고 강하게 확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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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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