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가 '민들레 홀씨'에 날려 보낸 것 [공연]

글 입력 2020.06.0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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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잘못 내린 탓에 보광동의 골목 골목을 누볐다. 신전떡볶이 건물 옆에서 시작된 골목길은 맹렬한 오르막 계단을 건너고 여러 주택 문 앞을 지나며 흘린 땀방울은 집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감수할 만하다고 여겨졌다.


완만한 경사진 대로변에 술집, 파스타 가게, 편의점, 타코 집이 즐비해 있었다. 물을 사기 위해 들어선 편의점에는 자기 개성껏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오갔다. 소박하면서도 특이한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데 빨간 간판의 창작예술집단 보광극장이 있었다.

 

오랜만의 연극 관람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다. 어둑한 지하로 들어서니 까만 상·하의를 입은 사람들이 극장을 산책이라도 하듯 넘실넘실 걷고 있었다. 내게 손 세정제를 건네주고 열을 재주던 사람들이 극장의 불이 꺼지자 배우가 되어 나타났다. 이런 모호한 경계가 낯설어 부끄럽기까지 했다.


생경한 기분, 연극을 보는 내내 아까 나에게 인사를 건네던 저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되어 극장에 쩌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 자신은 이 공간에서 누구를 연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배우들이 총처럼 비접촉 체온계를 이마에 겨누어 열을 재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으로 극은 시작했다. 예술인들은 현실을 승화하는 힘을 가졌다.


 

포스터.jpg

 


연극 <민들레 홀씨>는 1950년생 자훈의 이야기이다. 노년의 자훈이 등장하여 무대 뒤편을 아련히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의 지난 시절이 회상된다. 아들을 바라던 집안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아들 자 (子)를 써서 자훈이라고 이름 지어졌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자훈은 햇빛 아래서 발명가 아버지가 만들어준 양산 모자를 쓰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다.


 

민들레.jpg

 

 

그런 자훈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어딘가 눈물 젖어 있다.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딸에 대한 쓰라림일까. 그 시선은 들에 핀 민들레를 바라보는 눈길과도 닮아있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죽은 당신의 아들도 어디론가 자유로이 날아가 땅에 박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길 바라는 염원도 담겨있다.

 

그 염원은 자훈의 아버지가 발명한 행복 기계로 인해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자훈의 어머니는 행복 기계를 향해, 동시에 관객석에 앉은 우리를 향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행복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과거의 향긋함을 맛본다. 당신의 어머니의 고향 이북을 바라보며 그야말로 행복을 맛보는 듯한 표정이다.



행복기계.jpg

 

 

그러나 이내 그 표정은 경악으로 바뀐다. 행복 기계에 죽은 아들이 나타났다. 그리워 마지않는 아들을 보고 왜 어머니는 그리도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은 것일까. 어떤 소중한 것들은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그리워하게 된다. 그 그리움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을 잡아먹을 정도로 커지는 반가움과 슬픔은 이내 두려움으로 변모한다. 민들레 홀씨를 타고 날아간 그의 아들이 까만 그리움이 되어 나타났을 때, 자훈의 어머니는 이것은 행복 기계가 아니라 불행 기계라고 말한다. 행복 기계는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조금 더 자란 자훈은 대학을 가겠노라 선언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반대한다. 이에 서울로 올라가 구로공단에서 일하며 의상 디자인 공부를 시작한다. 명동에 번듯한 양장점을 차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훈은 놀지도 쉬지도 않고 돈을 모은다. 즐거운 듯 즐겁지 않은 노래를 부르며 재봉질을 하는 여공들 사이로 유독 자훈의 눈빛만이 선연하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순이의 집'에 가본 적이 있다. 좁은 한칸 방에서 여러명의 여공들이 모여 자며 밥을 해먹던 그곳에서, 해지고 방에도 어둠이 찾아오면 자훈은 그곳에서 어떤 꿈을 꿨을까.


 

구로공단.jpg

 

 

그러나 꿈을 키우기도 잠시, 어머니의 병환으로 모은 돈을 고향에 보내게 된다. 그렇게 양장점을 차리겠다는 꿈은 일단락되었다. 얼마나 많은 딸의 꿈이 집을 위해, 아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단락’되었을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큰 꿈 안고 서울에 왔을 우리 엄마도 꿈이 있었을 텐데, 민들레 홀씨를 타고 날아가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이를 단순한 상실감이나 허망함으로 적기에는 자훈과, 엄마와, 딸들의 꿈이 여적 계속 크고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적지 않기로 한다.

 

자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사회 탓에 동창회 한번 나가기 어렵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사장이 되어있기도, 계속 고향에 남아있기도, 그리고 또 다른 자훈이 되어있기도 한다. 자훈의 꿈은 아이 잘 키우기가 되어있었고 양장점 차리는 게 꿈이었지 않냐는 친구들의 말은 서로 덮이고 얽히며 ‘자훈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병수의 말로 귀결된다.



노년의 자훈.jpg

 

 

시간이 흘러, 어린 시절에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자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자훈은 그새 자신의 어머니와 똑 닮아 있었고, 할머니가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자훈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감나무와 눈맞춤을 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던 자훈.

 

자훈은 길고 길었던 인생을 마치고 노년의 자훈과 젊은 날의 자훈은 서로를 폭 안아준다. 이는 어머니와의 조우이기도 하며 잃었던 어린 날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딸들은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자신의 어머니를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

 

민들레 홀씨라, 중학교 시절 합창 공연을 했던 노래가 떠올랐다. “햇빛 찬란한 아침 영롱한 민들레 홀씨, 온세상에~ 온세상에~”민들레 홀씨는 그 자체의 존재보다는 ‘날아갈 수 있는’ 것에서 가치가 비롯되는 듯하다. 모두가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만을 노래한다. 어쩌면 우리도 흔들리고 떠다니고 날아다니는 그 모든 순간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게 되는 걸까, 생각했다.

 

우리는 노년의 자훈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부터 '관객'이라는 입장에서 연극에 참여한다. 자훈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와, 나를 떠올린다. 어머니를 닮아가는, 점점 이름을 잃어가는 나. 나의 꿈은 얼마나 빛바랠까. 나는 어쩐지 엄마를 닮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금은 미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연극 '민들레 홀씨'를 보고 나서 나는 엄마를 떠올렸고, 엄마가 살아왔을 서울을 생각하게 되었다.

 

민들레 홀씨에 날린 것은 우리네 삶 뿐만이 아니었다. 인생에 케케 묵어있던 미움과 후회, 미련 가득한 사랑. 다 홀씨에 실어 날려 어딘가에서 또 싹을 틔우겠지. 그 서툰 감정들은 또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또 민들레 꽃을 피워낼 것이다.

 

작은 상자 의자를 끌며 공간을 만들어낸 보광극장, 앞으로의 공연이 기대된다. 어두운 공간에서 까만 옷을 입은 그들을 보니 마치 까만 옷이 크로마키처럼 느껴졌다. 까만 도화지에 그 때 그들이 입었을 옷과, 묻혔을 흔적과 먼지를 상상하게 된다. 민들레 꽃내음이 가득한 그 공간에 또 한번 가보고 싶다.

 


*

   

민들레 홀씨

- Dandelion Spore -

 

 

일자 : 2020.05.14 - 2020.06.07

 

시간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3시, 7시 30분

일요일 오후 3시

 

*

화/수 공연 없음

 

장소 : 보광극장

 

티켓가격

전석 20,000원

 

주최/주관

창작예술집단 보광극장

 

관람연령

만 12세 이상

 

공연시간

90분

 

 

[황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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