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연한 것들에 질문하기 - 마녀배달부 키키, 1998 [영화]

글 입력 2020.05.3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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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얼마 전, 내가 글을 쓰는 아트인사이트의 대표님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건 그때 튀어나온 말이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앞서 나누었던 대화들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학교 강의를 보더라도 우리가 질문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 수가 있다. 질문이 있는 학생은 질문을 해달라는 교수의 요청에도 선뜻 용기 있게 나서서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은 드물다. 오죽하면 수업 전에 미리 질문을 생각해두라는 공지가 있을 정도다. 아예 질문을 한 번 할 때마다 해당 학생에게 추가 점수를 주는 교수도 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걸까. 아니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걸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날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도서관을 시장 바닥처럼 토론과 논쟁의 장으로 활용하는 유대인들에겐 우리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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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만약 이 세상에서 질문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대략 세 가지 단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에 실패한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묻고 의견을 교환할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연히 그들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스스로를 향한 질문을 멈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멈춘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대신 타인이 정해준 답을 마치 자신의 답인듯양 그대로 따라간다. 학생은 공부를 잘해야 해, 성공의 기준은 돈이야, 더 좋은 학벌과 직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해 등등. 물론 이러한 결론들이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게 스스로 사고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나와 있는 모범 답안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의 개성은 매몰된다. 자유를 가장한 권위가 득세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스스로는 남들과 다르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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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질문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학교 강의에서 교수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 있으면 꼭 눈초리가 따가워지는 학생 역시 함께 존재한다. 교수님께 눈도장을 찍으려 한다는 둥, 덕분에 수업 시간이 길어진다는 둥.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대부분의 질문은 수업 중이 아니라, 수업이 끝난 후에 이뤄지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예 그렇게 하기를 권하는 교수들도 있다. 마치 마약거래처럼 질문과 답변이 암암리에 행해진다.

 

이는 비단 교육 현장에서만 일어나진 않는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논쟁에서 ‘왜 여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woman에는 남자를 뜻하는 영단어인 man이 들어가 있는지’, 여성스럽다, 예쁘다 같은 말들이 왜 실례일 수가 있는지, 페미니즘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쓸데없는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질문이 왜 등장했는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떠한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서 질문의 부재는 결국 소통의 부재를 낳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과 소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득세하게 될까. 첫 번째는 바로 독선이다. 오로지 나만이 옳다는 믿음, 나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이를 바꿔 말하면 독재와 전체주의가 된다. 보다 쉬운 말로 바꾸면 파시즘과 나치즘이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전 세계를 전쟁의 화마로 몰아넣었던 독선은 바로 그렇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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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무지다. 역사상 거대한 변화를 만들었던 사건의 이면에는 항상 당연한 것들을 향한 질문이 있었다. 왜 인간은 평등하지 않은가. 왜 인간은 종교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왜 흑인과 여성은 차별받아야 하는가. 뉴턴이 중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질문 덕분이었다. 세상이 존재한 이래 사과는 수도 없이 땅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뉴턴은 그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졌기에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우리가 질문하기를 멈춘다면 새로운 생각과 발견은 등장하지 않는다. 설령 기적적으로 등장하더라도 이를 타인에게 인정받는 건 더 어렵다.

 

그러니까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특히 당연한 것들일수록 더더욱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라는 황현산 작가의 말마따나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체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 속에서 키키는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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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모든 마녀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키키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마녀라 하면 마법을 쓰고, 마법약을 만들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들을 당연하게 떠올리지만 우리의 주인공 키키는 마법은커녕 마법약도 만들 줄 모른다. 그녀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오로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뿐이다. 키키도 있는 마당에 하늘을 날지 못하는 마녀라고 없을 리가 없다.

 

한편 하늘을 날고 싶은 소년 ‘톰보’는 키키를 동경한다. 하늘을 날기 위해선 온갖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하는 그와 달리 키키는 그저 빗자루만 하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키키는 자신을 부러워하는 톰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일로 하는 거잖아. 늘 즐겁지만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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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특별한 재능인 ‘비행’이 키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 이유로 키키는 톰보와 달리 하늘을 난다는 걸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늘을 나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톰보의 친구들을 만난 키키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놀러 다니기 바쁜 톰보의 친구들과 달리 언제나 까만 옷차림에, 돈이 없어 갖고 싶은 신발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키키는 처량하게 느껴진다. 기분이 우울해진 키키는 홀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순수하고 밝은 키키는 어디론가 가버렸나 봐.” 그리고 그날 이후, 마치 거짓말처럼 키키는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된 키키는 무력감에 빠진다. 하나뿐인 친구인 검은 고양이 지지의 말도 이젠 알아들을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걱정에도 키키의 기분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다. 마법의 힘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그때 키키에게 숲에서 만났던 우르슬라가 찾아온다. 키키의 이야기를 들은 우르슬라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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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슬라: 마법이나 그림이나 비슷하네. 나도 그림이 안 그려질 때가 종종 있어.


키키: 정말? 그럴땐 어떻게 하는데? 예전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서 날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우르슬라: 그럴 때는 버둥거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리고, 그려대는 거야.


키키: 그래도 여전히 날지 못하면?


우르슬라: 그리는 걸 관두지. 산책을 하거나, 경치를 구경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안 해. 그러는 도중 갑자기 그리고 싶어지는 거야.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그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한, 굉장히 특별한 일이다. 하늘을 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키키의 일상에서 존재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슬럼프를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키키’라는 존재가 무너지진 않는다. 그녀의 일상은 안전하다. 키키에게 필요한 건 그동안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 특별함을 아는 것뿐이다.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모습일까? 왜 나는 날지 못하는 걸까? 그 모든 고민의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키키는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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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후반부 그녀의 비행은 초반부에 보여준 그녀의 비행과는 분명히 다르다. 초반에는 마녀로서 부여받은 당연한 능력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비행이었다면 후반부의 비행은 목적성이 분명하다. 마녀니까 날아야 하는 게 아니라, 톰보를 구하기 위해서 키키는 날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톰보를 구해냈을 때 마을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키키는 사고뭉치 초보 마녀에서 마을의 일원이 되었음을, 그녀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어쩌면 성장이라는 건 바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향해 질문하기.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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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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