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시국의 취준생은 뭐라도 한다 [사람]

글 입력 2020.05.28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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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날 좀 좋아지면 만나자.”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들에게 석 달째 똑같은 인사를 건네고 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인연이라면 저 정도로 마무리를 지어도 아쉽지 않지만, 정말 얼굴 한 번 보고픈 이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어떻게든 모여볼 만한 장소를 물색해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약속은 기약없이 미뤄지고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콕생활’을 계속해나간다.

 

학생 시절의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취준 공백기에 돌입한 지금, 운명의 장난처럼 전 세계적인 전염병이 돌고 있다. 지금 이 시국에 취준생이라니. 주변 사람들은 내 처지를 가엾게 여기든가, 아니면 동병상련을 겪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나 혼자에게만 들이닥친 시련이 아니다 보니 어디다 하소연하기도 뭣하다. 하소연해봤자 상황이 나아질 리 없으니 더욱 말을 아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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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코리아와 알바몬에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취준생의 자존감을 빼앗는 범인은 역시 '나 자신'이 제일로 꼽혔다고 한다. 취준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건, 내가 이 기간을 어떻게 버텨내는 게 맞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정답이 없으니 뭘 열심히 해도 불안하고, 안 하면 그것대로 불안하다.


최근에 들어서야 인정한 사실이지만 나는 극도의 안전주의자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있으면,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지 않는 것 같으면 불안감이 엄습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건 기분일 뿐이고 막상 취준 기간이 석 달을 넘어서니 이런 평온한 일상에 슬슬 적응하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다. 취업에 성공하면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야 할텐데,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준비기간은 막상 이처럼 평화롭다니.

 

뭐라도 준비해 보겠다는 마인드로 3월을 맞이한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공모전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전문가들을 흉내내면서, 누가 누가 더 전문가의 탈을 잘 쓰고 있는가? 뭐 그런 걸 테스트해보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어째 공모전은 준비하면 할수록, 팀 과제에 시달리던 시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건방지게도 신성한 배움의 기회를 괄시하는 학생이었기에, 팀 프로젝트라는 건 교육을 빙자한 노동력 착취라고 굳게 믿었다.


이렇게 뼈빠지게 팀 전체를 A+로 몰고 가도 나는 등록금을 받는 게 아니라 줘야 한다는 사실에 욕을 하면서, 어차피 동일하게 고생할 거면 지금 당장 어디든 취업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뭐, 일을 몇 번 해보고 나니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고생할 거면 돈이라도 받는 게 백 번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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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BN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시도했던 또 하나는 달리기였다. 농담이 아니라 나는 정말 3, 4월간 아침 달리기에 매진했고, 두 달 간의 꾸준한 시도 끝에 ‘30분을 안 쉬고 달리기’에 성공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버티기도 체력이라며 운동의 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째 갈수록 나와의 경쟁이 되더니 기어코 목표 달성을 해낸 것이다.


더 웃긴 건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급격히 흥미를 잃어버린 나는 5월이 되자 달리러 나가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고 (날씨가 더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은 다시 달리기 세포를 잃어버린 백수가 되었다. 그 시기는 내가 지원서를 낸 기업에 서류합격을 한 시기와 거짓말처럼 맞물린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에 블루투스 이어폰 속에서는 힘찬 목소리의 보이스 트레이너가 외치고는 했다. “지금 이 순간, TV 앞에만 앉아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지금 당신의 모습을 생각하세요! 당신은 한 발짝 앞서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TV 앞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달리기 좀 한다고 해서 내가 그들보다 ‘앞서나간다’라는 표현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어이없는 건 어이없는 거고, 내 속에 숨겨진 한국인의 피는 그 말에 설득이 되었던지 더욱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경쟁사회의 미덕에 길들여진 나는, 달리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놀고먹는 백수나 기약없는 취준생 대신 ‘앞서나가는 사람’이 되는 걸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은 어디까지 나를 합리화해야 만족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이슬아 작가는 달리기를 하면서 ‘슬픔을 길 위에 버리면서 달렸다’ 고 표현했다. 멋진 말이었다. 보이스 트레이너 쌤 역시 비슷한 말로 기운을 북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달리면서도 속세를 내려놓지 못하고 오히려 곱씹고 새롭게 흡수하고는 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재미없는 인간인지를.

 

재미없고 뻔한 나는 두 발짝 더 앞서나가고, 이 지긋지긋한 취준 시기를 탈출하기 위해 오늘도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고 공모전을 제출하고 다음 공모전을 기약한다. 나의 수많은 노력과 게으름들 중에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런 건 하나도 없고, 그냥 나는 인정받고 싶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은 욕구에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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