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작은 숫자 강박관념

여성에게 강요하는 다양한 작은 숫자들
글 입력 2020.05.28 00:45
댓글 2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친구가 귀찮은 일이 생겼다고 했다. 구입했던 바지를 교환해야 했다. 몸집이 워낙 작고 마른 체형이다. 당연히 더 작은 사이즈로 교환한다는 말로 들었다. 벨트로 감당이 되지 않을 수준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얼떨떨해했다. 걸을 때 허벅지가 접히는 형태가 옷 겉으로 보이면 작은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작은 옷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던 친구는 평생을 S, M, L 중에 S 사이즈를 입었고, XS 사이즈가 있으면 그걸 골랐다. 이번에도 당연히 S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M 사이즈로 교환한다는 말이었다.

도대체가 어떤 옷을 팔면 이 친구가 M 사이즈를 입어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이 쇼핑을 가면 해외 SPA 브랜드에서 제일 작은 32 사이즈도 가끔 너무 크다며 아쉽게 그대로 두고 나온 걸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다.

젠더프리 옷들이 많아지면서 백래시(backlash)로 아동복 사이즈의 크롭티가 많아졌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뼈말라’, ‘개말라’, ‘프로아나(전문가pro+거식증anorexia의 합성어)’ 해시태그가 유행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바로 옆에서 마주친 충격의 여파는 대단했다. 나 자신 스스로는 논의를 끝낸 작은 숫자들에 대해서 떠올리기 시작했다.

 
5523425885_0900138aae_b.jpg
Though Catalogue

 


반면에 나는 키가 어린시절부터 큰 축에 속했고 따라서 몸무게도 (또래에 비해서) 많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신발 사이즈도 여자치고는 컸다. 성별로 구분된 이 세상의 미의 기준에 따라 나는 위축됐고 키가 작아 보이기 위해서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20대 초반에는 똑바로 눕기가 힘들 정도였고 도수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도 “너가 힐을 신으면 남자들한테 예의가 없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다. 휘청휘청거리느라 불편해도 사회에서 요구(주입된 미의 기준과 더불어 키에 상관없이 힐을 신어야 하는 직종도 존재하므로)해서 겨우 신었더니만 예의가 없단다. 나보다 키가 작아서 상처받을 남자들의 자존심을 지켜주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내 자존감은 깎여 내려가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연스러운 성장을 제한받았고, 숙이기를 강요받았다. 사람들은 내 자존감을 끌어다가 본인들의 자존심을 채웠다.

작게 나온 바지도 27, 28사이즈 이상은 절대로 건들지 않았고, 작게 나온 신발도 240mm를 꼭 신었다. 구두는 230mm~235mm가 예쁘다고 하던데 걱정이었다. 골반뼈는 항상 아렸다. 살이 아니라 뼈의 문제였는데도 나만 볼 수 있는 바지 안쪽의 사이즈택에 집착했다. 골반바지가 아닌 바지들은 24, 25 사이즈를 입을 수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발은 무지외반증과 약간의 내성발톱이 생겼다.

 
Why-Asia-is-Obsessed-with-White-Skin-and-Whitening-Products-768x512.jpg
Eco Warrior Princess

 


21호를 쓰면 되겠다며 화장을 가르쳐 준 언니는 칭찬했다. 하얀 편인 피부는 누구를 만나던 간에 꼭 한 번은 언급됐다. 그럼에도 더 하얗게 만들기 위한 피부 화장 권유(이자 강요)도 끊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썼던 베이스 때문에 피부가 오돌토돌하게 올라왔고 화장독을 며칠 견뎌야 한다는 괴상망측한 말에 나는 피부화장을 포기했다.

“50키로 넘기면 여자냐?”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40kg도 졸업한 중학생의 나에게 앞자리가 ‘4’라는 건 꿈이기도 했다. 키는 꾸준히 컸고 몸무게도 폭주했다(고 생각했었다).

20대까지의 나의 나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좀 들어보이는 편인 나는 어려보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동안은 칭찬이지만, 노안은 안타까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시집을 잘 가야 했고, 취직해야 했다.

키는 그만 커야 했고, 피부 호수는 점점 작아져야 했고, 몸무게도 줄어들어야 했고, 허리 사이즈도 얇아져야 했다. 얼굴도 작아야 했으며, 어깨도 좁아져야 했고, 손과 발의 크기도 작아야 했다(가슴 사이즈는 ‘밑둘레는 작게 컵 사이즈는 크게’가 지론이었다).

당장 한국만 벗어나도 내 정수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외국에서 트래킹 투어를 다니다 보면 나는 너무 왜소했고, 약해보였다. 겪어왔던 모든 범주적 착오와 잣대와 건방진 판단들이 조소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나를 짓누르는 타인의 침해가 한없이 무거운 중량일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 사람들의 발이 작은 거고, 그 사람들의 키가 작은 거고, 그 사람들의 허리가 얇은 거다. 내가 나의 큰 몸 안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너무도 작았던 거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던 나는 잊혔었다.
 
*

나는 “내가 청개구리라서 그렇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쯤 되니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해야겠다.

‘작은 숫자’에 모두를 칭칭 동여매고자 했던 나는 남성 코너에 가서 옷을 구매하고 거기서도 L 사이즈 티셔츠를 골라온다. 세상은 나를 품기에 한없이 좁은 어깨를 가지고 있다. 나의 움츠렸던 어깨를 펴니 키는 더 커졌다.

나에게 작기를 강요할수록 나는 더 커져야겠다. 몸을 만들어가면서 재밌었던 것은 같은 부피의 근육이 지방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큰 체중계의 숫자가 생존가능성을 높혀준다는 말이다.

호수가 큰 검은 피부가 더 자외선에 강하며, 큰 키는 지하철에서 넓은 시야와 맑은 공기를 독점한다. 큰 발은 몸의 지지 기반이 되어준다. 나는 어린 나에 비해 현명해졌으며,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이 아라비아 숫자가 무한대의 범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너무 최전방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나에게 작기를 강요할수록 나는 더 커져야겠다.

 
본문.jpg
Getty Images

 


 

Tag.jpg


 

[박나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2
  •  
    • 유독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숫자들이 현재도 미래에도 강요되어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걱정이 듭니다.  하지만 에디터님의 마지막 자세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여성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의 잣대도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사회의 기준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만족하기 위해 갈망했던 저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면서 저도 다짐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0 0
  •  
    • 느낌있는 글 잘 읽었어요 공감갑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