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들의 선택, 믿음, 그리고 품위 - 시카리오 시리즈 [영화]

글 입력 2020.05.2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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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리오

SICARIO, 2015&2018


감독 : 드니 빌뇌브(1편), 스테파노 솔리마(2편)

배우 : 조슈 브롤린, 베니시오 델 토로

 

FBI 요원 케이트는 마약상을 검거하러 출동한 현장에서 다수의 시신을 발견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경찰관이 사망하자 미국 정부는 이 사건의 배후인 소노라 카르텔에 대한 응징을 결정한다. 이 비밀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케이트와 CIA 작전 책임자 ‘맷’, 의문의 작전 컨설턴트 ‘알레한드로.’ 하지만 작전이 진행될수록 케이트는 그들이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맷은 그동안 숨겨두었던 이 작전의 진짜 목표를 들려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국경을 통해 유입된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내에서 테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미국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들을 국경으로 이동 시켜주는 카르텔을 소탕하기로 결정한다. 이 작전을 위해 다시 한 번 모인 ‘맷’과 ‘알레한드로.’ 하지만 작전의 마지막 순간, 멕시코 경찰의 배신으로 상황이 꼬이게 된다. 국경에서 멕시코 경찰관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난 여론을 의식한 미국 정부는 작전 취소를 결정하고, 맷에게 홀로 국경에 남겨진 알레한드로를 제거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알레한드로는 살아남기 위해 미국으로의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소년이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별일 없냐는 듯 가게 주인에게 턱짓을 해보이고 밀실 안으로 들어간 소년을 초로의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 앉아. 마치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그대로 얼어버린 소년은 겨우 의자에 앉는다. 남자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하다. 시카리오가 되고 싶다고? 남자가 묻는다. 소년은 여전히 말이 없다. 막힌 숨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며 남자는 드디어 몸을 움직인다. 문을 닫는다. 그리고 말한다. 네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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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강원도 삼척에서는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4명이 죽고, 12명이 다친 꽤 큰 사고였다. 하지만 언론의 관심을 끈 건 단순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느냐가 아니었다. 분명히 16명이 탑승해 있어야 할 그 차량에서 발견된 사람이 13명이었던 것이다. 언론의 관심은 자연스레 사라진 3명에게로 몰렸다. 이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라진 3명은 외국인 불법 체류자로 경찰에게 잡혀 추방당하는 게 두려워 사고 직후 현장에서 모습을 감쳤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네티즌의 반응은 엇갈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동정하는 시선과 불법을 저지른 그들에게 무슨 관용이 필요하냐는 반응으로. 어느 것이 옳은 의견인지는 나는 알지 못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둘 다 옳다. 인권을 옹호하는 쪽은 그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옳다. 엄격한 처벌을 요구하는 쪽은 그들이 법치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옳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인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밝혔듯 ‘정치란 결국 선의의 싸움’이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선善와 악惡이, 시是와 비非가 모호한 경우엔 무엇이 중요할까. 그건 바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이방인의 시선



개인적으로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1’)를 보고 나면 ‘케이트’를 연기했던 에밀리 블런트의 연기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맡은 역할이 관객들의 심리를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시카리오1>은 케이트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다. 누구보다 정의를 추구했던 그녀는 마약범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 이번 작전에 자원하였다. 하지만 맷과 알레한드로를 비롯해 작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이방인 취급한다. 작전이 진행되는 내내 마치 행성 주변을 맴도는 위성처럼 그녀는 늘 소외되어 있다. 성별에서도(그녀는 그곳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사용하는 장비에서도(지급받은 군용 장비를 사용하는 동료들과 달리 케이트는 자신이 직접 챙겨온 경찰특공대 장비를 사용한다). 유일한 국내 요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늘 맷과 알레한드로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질문에 대해 명쾌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지시할 뿐이다. 시계바늘이나 잘 보고 있으라는 둥, 무기를 꺼내라는 둥.

 

물론 영화 속에서 케이트의 이러한 위치는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앞서 말했듯 케이트는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작전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녀는 후아레즈를 목격하고 체험한다. 일례로 소노라 카르텔의 중간 두목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알레한드로가 ‘후아레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자, 카메라는 길거리에 전시된 시신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케이트의 표정을 구태여 하나의 테이크에 담는다. 시점 쇼트로 분할하여 찍으면 간단할 것을 도대체 왜? 그건 그녀가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 때문이다.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각각의 포지션이 있다. 케이트의 포지션은 바로 목격자다. 그럼 이쯤에서 질문 하나. 그녀는 그곳에서 과연 무엇을 목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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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포지션



땅굴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맷은 반항하는 그녀에게 이 작전의 진짜 목표를 들려준다. 그가 말해준 논리는 이러한 것이었다. “세계 인구의 20%를 설득해서 마약을 끊게 할 수 없다면 질서가 최선이야.” 그러니까 현재 마약 상권을 틀어쥐고 있는 소노라 카르텔을 공격한 뒤, 상권을 메데인 카르텔에게 넘겨 CIA의 통제 밑에 두는 것이 이번 작전의 진짜 목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맷은 카르텔로부터 가족을 잃었던 알레한드로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10월, 트럼프 대통령은 IS의 수괴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미군에 의해 제거되었음을 알렸다. 사실상 IS의 완전 격퇴를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문제가 발생했다. 터키가 시리아 북동부 지역의 쿠르드족을 향해 침공을 감행한 것이다. 쿠르드족은 미국을 도와 IS 격퇴에 활약했던 세력 중 하나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터키의 군사작전에 개입할 뜻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심지어 시리아 지역에서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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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국으로서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최근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싸고 이란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이란을 압박하기 위해 이란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도움이 절실한 가운데, 터키는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이다. 따라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한편 시리아에서 IS에 맞서 쿠르드족과 함께 싸운 미군 병사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한 병사는 어깨 위에 금지된 YPG(쿠르드 민병대 인민수비대) 부대 표식을 부착하며 항의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들은 자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함께 싸웠던 전우들이 터키군의 공습에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맷은 미국 정부다. 카르텔은 IS를 비롯한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의 축이다. 카르텔을 잡기 위해 협조했던 알레한드로와 멕시코 당국은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미국이 손을 잡았던 ‘쿠르드족’과 같은 외부 세력을 상징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맷(미국)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실현된 건 결국 맷(미국)의 정의뿐이다. 유명한 시사전문 유튜버 중 한 명은 영상의 말미에 항상 이런 말을 쓴다. “국제 정치는 야생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말하는 정의란 여러 야생동물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그들끼리의 서열 다툼을 유도하는 것이었다(이것이 맷이 말하는 견제와 균형이다). 대신 야생동물이 사라진 나머지 장소에서는 인간들을 위한 안전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물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보호구역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달콤한 말들로 시민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알레한드로와 멕시코 당국이 꿈꿨던 정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들은 애초부터 한 곳에 고립되어 모여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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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신들도 이해하게 될 거야


 

한편 맷의 말에 분노한 케이트는 자신이 알게 된 것들을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알레한드로로부터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알레한드로를 쏠 기회는 있었다. 자신이 서명한 것은 협박 때문이었으며, 진짜 진실은 따로 있다고 뒤늦게 라도 양심 고백을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레한드로를 쏘지도, 진실을 밝히지도 않는다.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걸까. 어쩌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맷의 정의 덕분에 그녀와 그녀가 사는 미국은 좀 더 안전해졌다. 예전처럼 마약 단속을 나갈 때마다 부비트랩을 걱정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레한드로와 멕시코는 아니다. 카르텔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알레한드로는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카르텔들의 타겟이 되어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실제로 <시카리오2>의 초반부, 알레한드로는 습격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카리오1>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인 엘페소와 후아레스는 선을 맞대고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후아레스는 폭력이 일상화된 세계다. 매일 밤 살인과 납치가 벌어진다. 그곳에선 무장한 군인들이 갑자기 대로변에서 카르텔 조직원들과 총격전을 펼쳐도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다. 멀리서 빗발치는 총알 소리에도 사람들은 한가롭게 손 스쿼시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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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엘페소는 밤이면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폭죽소리로 포장할 만큼 여유와 한가로움이 가득한 도시다. <시카리오1>은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 위로 총소리가 들려오면서 끝이 난다. 그건 아마도 새로 주도권을 잡은 메데인 카르텔이 소노라 카르텔을 사냥하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메데인 카르텔이 득세한다고 해서 매일 밤 반복되는 악몽이 끝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왕이 바뀌었을 뿐이다. 왕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길거리엔 그들의 시신이 전시될 것이다. 죽은 경찰 ‘실비오’의 빈자리는 또 다른 부패 경찰이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또 다른 아이가 생겨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의 마지막에서 케이트가 흘린 눈물은 의미심장하고 복잡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여전히 지옥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야하는 그들에 대한 연민과 근심.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기타 등등.

 

그러고 보니 영화의 초반부, 이 모든 사실을 예견이라도 한 듯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댁들 미국인의 눈에는 우리가 하는 짓이 의심스럽겠지만 결국 당신들도 이해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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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테러리스트


 

한편 마약에 집중했던 <시카리오1>과 달리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이하 ‘시카리오2’)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난민과 테러리즘의 문제를 끌어온다. 어쩌면 각본가인 테일러 쉐리던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시카리오2’가 아니었을까. <시카리오1>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늑대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에서 끝이 났다면 <시카리오2>는 야생의 세계를 살아가는 늑대들의 이야기다.

 

<시카리오2>는 마트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이는 테러리스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미국 정부는 이들이 난민으로 위장하여 멕시코를 거쳐 밀입국했으며, 그 과정에서 카르텔이 이들의 밀입국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 정부가 이들에 대한 응징을 결정하자 맷과 알레한드로는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한다. 그들의 작전은 언제나 같은 방식이다. 경쟁 카르텔과의 전쟁을 부추겨 두 조직이 자연스레 와해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테러리스트를 만나게 된다.

 

2016년 대선을 통해 미국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사이에 장벽을 건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17년에는 반이민 행정명령으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트럼프가 반이민 정책에 매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민 유입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고, 난민들 속에서 숨어드는 테러리스트의 위험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도 2016년, 테러에 대한 위험의식이 높아지자 박근혜 前대통령의 제안으로 테러방지법이 통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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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리오2>의 초반부, 국방부 장관은 맷에게 테러리즘을 정의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에 따르면 테러리즘이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어떻게’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어떻게 우리를 공격할 것인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반면에 ‘왜’를 묻는 사람은 없다. 테러는 왜 발생하는가? 왜 난민들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서방으로의 탈출을 감행하는가?

 

그러한 의문에서 출발한 영화가 바로 <시카리오2>다. 누가 난민을 만들어 냈는가? 또 누가 테러리스트가 되는가? 그 물음의 대답은 <시카리오1>을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시카리오1>은 미국이 그동안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며 저질러온 일에 대한 고발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였다. <시카리오1>에서 미국이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은 견제와 균형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본 건 미국뿐이다. 멕시코는 여전히 카르텔이 활개 치는 지옥의 온상이다. 그곳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지옥을 떠나는 것뿐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난민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 뚜렷한 적개심과 정치적 목적을 지닌 자들은 테러리스트가 된다.

 

쉬운 이해를 위해 앞서 언급한 쿠르드족을 예시로 들어보자. 한 때 미국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IS를 격퇴하던 그들은 미국의 버림을 받고 터키군의 공격을 걱정해야 한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은 아마도 난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자신들을 버린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운 일부는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오늘날 벌어지는 테러리즘의 배경에는 지난 세기 미국과 서방 세계가 저지른 과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쿠르드족에 대한 미국의 배신이,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제국주의 역사가 있다. 실제로 알카에다의 수장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절, ISI(파키스탄 정보부)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에 저항하는 이슬람 세력들을 ISI를 통해 지원했다). 수많은 난민을 야기한 시리아 내전의 배경에도 서방 세계의 이익 다툼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오늘날의 서방세계는 테러리즘과 난민 문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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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소녀: 미래를 향해서


 

이제 맷과 알레한드로가 만난 새로운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들은 그곳에서 소년과 소녀를 만난다. 소년은 멕시코계 미국인이고, 소녀는 카르텔 두목의 딸이다. 이제는 테러리즘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 과거의 테러리즘이 지난한 역사와 이념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촉발되었다면, 새롭게 등장한 오늘날의 테러리즘은 다르다. 소년과 소녀에게는 미국을 향한 특별한 적개심이 없다. 단지 그들의 부모가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에, 혹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테러리스트가 되도록 태어났다고 말하는 게 더 옳겠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통해 맷과 알레한드로는 지난 세월 자신들이 쌓아온 과오의 역사를 비로소 마주한다. 특히 알레한드로의 행로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원래 멕시코의 검사였지만 지금은 미국의 요원이다. 영화 중간에 청각장애인 부부의 집에 머물게 된 알레한드로는 부부에게 그들의 아기도 청각장애인이냐고 묻는다. 부부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다른 세상 같겠군요’라고 덧붙인다. 그는 비장애인이지만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딸 덕분에 수어를 안다. 다시 말해 그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인 것이다. 미국인과 멕시코인의 경계. 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경계. 그동안 그는 늘 경계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았다(개인적인 비극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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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전을 위해 납치한 소녀와 유사 부녀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리고 그녀와 살아남기 위해 가짜 난민이 되어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를 하면서 이제껏 무시했던 경계의 반대편을 향해 바라보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들이 방치해온 난민들의 지옥 같은 삶을 체험하고, 부모와 떨어진 채로 그곳을 살아가야 하는 어린 아이들을 향해 근심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결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한 뭉클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맷과 알레한드로는 각자 선택을 한다. 맷은 제거 명령을 거부하고 소녀를 데려다가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신청한다. 소년을 찾아간 알레한드로는 복수 대신 ‘네 장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한다. 하찮은 감상주의가 아니다. 그저 더 이상 이러한 방식으로는 비극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그들의 선택은 이제껏 늑대로서 살아온 그들의 삶과 대비되는 새로운 선택이다. 나아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시카리오> 시리즈는 지난한 미국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국의 현재와 미래를 묻는다. 그리고 마치 맷과 알레한드로처럼 우리도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이제 우리도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떻게’를 물고 늘어지는 대립과 혐오사회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왜’를 묻는 포용과 이해의 사회로 나아갈 것인지. 그리고 그 선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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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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