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픔을 대하는 n가지 방법 [음악]

글 입력 2020.05.2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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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슬픔과 기쁨의 상태를 오간다. 그렇지만 아무리 거시적인 감정의 순환을 인식하고 있다 할지라도, 당장 눈 앞의 미시적인 슬픔은 크게 다가오는 법. 슬픔을 느끼는 이도, 그를 지켜보는 주변인도 참 괴롭다. 그럴 때 슬픔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를 끄집어 내주는 실용적인 팁들이 있다. 혹시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깨끗이 몸을 씻는 동안 곳곳에 숨어있는 슬픈 기억도 함께 씻어내며, 감정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결 가붓해진 몸으로 평소 좋아했던 책을 읽든가, 마구 손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든가 하며 예술을 소비하는 것 역시 슬픔에서 벗어나는 백발백중의 행위 중 하나다. 그 중에서 오늘 주제로 삼고 싶은 것은, 슬픔과 위로를 다루는 음악들이다.

 

 

 

슬픔을 다루는 3가지 음악


 


Track 1. 구원찬 <슬퍼하지마>

Track 2. 민수


 

당장의 슬픔이 나에게 물밀 듯 밀려올 때, 극약 처방인 노래들이다. 나를 아껴주는 누군가가, 조용히 괜찮다고 말을 건네는 듯한 가사. 일상적으로 많이 오가는 말이기에 가사만 읽는다면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슬픔을 위로받는다'라는 상황을 실제로 전제한 뒤 가사를 다시 읽는다면 '슬퍼하지 마'라는 한 마디에 담긴 여러 마음들이 튀어 나온다. 혼자서 일정 수준의 평탄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기에 평소에는 둔감했던 무언가가, 슬픔으로 인해 풍랑처럼 울렁이게 되는 그 순간. 다가오는 지극히 평범한, 꾸밈도 없이 짧은 그 말이 미치는 파급력은 극대화된다. 구태여 함축적이거나, 미사여구가 잔뜩 들어 멋을 부릴 필요 없었다.


 


 

나는 너에게 다 맡기라고 말하고 싶어

나는 너에게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


너의 우울을 가져가고 싶어

현실은 나의 바램을 모르고

난 그저 널 안아줄 수 밖에

 

 

슬픔의 상태를 형상화해본다면, 아마 내 주변이 밀도 높은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이는 모양새가 아닐지. 무형의 감정은 일종의 진입 장벽이 되어, 평온한 시절 무던히 좋아했던 행위, 물건, 음식... 웬만한 것은 몽땅 마다하게 만드는 마력을 내뿜는다. 이 막을 뚫을 수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것 중 가장 효력이 좋은 것, 바로 진심이 담긴 타인의 위로다.

 

누구든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슬픔에 잠겨 있는 누군가를 제대로 위로하기는 참 쉽지 않다. 그 난이도 때문에 위로가 슬픔 대처법으로서 격하되었을 지도 모른다. 선뜻 말을 잘못 건넸다가는 더 큰 화를 부르기 십상이었다. 나의 경우로는, 어떻게든 그 슬픔을 해결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선뜻 문제 상황을 내 잣대로 판단하고 -나는 이게 옳다고 철썩같이 오해한 것이다- 곧 잘 해결되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표했다.


사실 나는 그 친구가 직면한 문제를 잘 알지 못하고, 애초에 타인의 슬픔에 완전히 동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을 하는 동안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야 했다. 의도치 않게 포장지가 겹겹이 쌓여버린 탓에 내 위로는 친구의 슬픔에 가 닿지 않았다.


 

 

 

너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지

 

많은 말이 아닌 딱 한마디로 너를  품에 안고 싶어

적지 않은 위로를 해봤지만 지금이 제일 어려워

(중략)

너의 옆에 있어주고 싶을 뿐이야

네가 나에게만큼은 기대줬으면 해

한껏 참다가 울어버리는 너에게

괜찮다는 말은 하고 싶지가 않아

그저 안아 주는 거 밖에 할 수가 없지

 


위로의 핵심은 그저 '나는 네가 슬퍼하지 않으면 해'라는 진심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것이다. 아무런 꾸밈 없이. 이는 타인의 슬픔에 자신이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위로하는 입장의 선을 명확히 그어두는 것은 언뜻 냉정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선을 그었기에 우리는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주체는 바로 슬픔의 발원지인 당사자이다. 주변인인 우리가 함부로 상황을 정리해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월권 행위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마음이 아플지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의 역할은 묵묵히 곁에서 기다려주는 것에 머문다. 거대하게 부푼 마음은 숨긴 채 슬퍼하지 말라는 한 마디를 건네는 것, 이따금씩 기대올 때 안아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뿐이면 된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슬픔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Track 3. 브로콜리너마저

<이웃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셰익스피어가 말했던가.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참는 건 이류. 그리고 힘들 때 웃는 건 일류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일류라고 다독이는 이들이 몇가지 단어를 빼먹었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 (울음을 삼키며) 웃는 (척 할 수 있는) 건 일류’라는 말이 아니었을지. <이웃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화자 역시 슬픔을 조용히 자기 선에서 삼키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친구가 내게 말을 했죠 기분은 알겠지만 시끄럽다고 

음악 좀 줄일 수 없냐고 네 그러면 차라리 나갈께요 

그래 알고 있어 한심한 걸 

걱정끼치는 건 나도 참 싫어서 

슬픈 노랠 부르면서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그 여름날 밤 가로등 그 불빛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너의 목소리에 믿을 수도 없는 꿈을 꿔 

이제는 늦은 밤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슬픈 음악 속에 난 울 수도 없는 춤을 춰


 

슬픔에 곧이곧대로 나를 맡긴 채 침잠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부단한 움직임.  드럼 비트가 강하게 섞인 신나는 멜로디에 힘찬 목소리. 흥얼거리며 대충 흘려듣다보면 달뜬 목소리에 저절로 춤이 나올 만큼 활기찬 노래다. 그러나 가사를 음미하며 듣다보면, 조금 다른 낌새를 눈치챌 수 있으며 곧이어 명랑한 목소리 안에 묘한 외로움이 끼어있다는 걸 포착할 수 있다. 이 모순적인 밸런스의 이유는 가사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가사 속 화자는 슬픔을 이기길 위해서 참 다양한 행동을 하고, 그 행동들은 다분히 적극적이다. 슬픈 노랠 부르면서 혼자 공원을 달리고, 가로등 불빛 아래 춤을 춘다. 갑자기 떠나버리거나 혹은 주먹으로 벽을 쳐볼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행동들의 공통점은 모두 고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안다. 그 고요함을 뚫고 들어간 화자의 마음속이 얼마나 시끄러울지. 아마 노래의 신나는 사운드보다 훨씬 더 불규칙적으로 쿵쾅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기분을 알겠는데 시끄러우니 음악 소리 좀 줄여달라는 친구, 밤늦은 시각 모두 잠들어버린 이웃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 슬픔을 조용히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명 친구에게 어느정도 기분을 이해받을 수 있을 만한, 꽤 얕지 않은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소개한 두 노래처럼 주변에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축복받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정 정도 이상의 슬픔을 표한다면 난색을 하며,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은근히 감정 정리를 요구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굳이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는 게 앞서 말했듯 슬픔을 지켜보는 이 역시 고통 분담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매몰되는 것은 매일 굴러가는 일상을 지치게 만드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야말로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을 향하여 노래의 화자는 차라리 나가길 선택한 것이다. 슬픔에 곧이곧대로 나를 맡긴 채 침잠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부단한 움직임. 이에 더하여 나를 지켜볼 이들의 슬픔까지 더불어 고려하는 화자의 성숙한 태도에서 나는 애달픔과 동시에 존경을 느낀다. 그렇기에 만약 언제고 나에게 슬픔이 도래했을 때 '울 수도 없는 춤'을 추면서 견뎌볼 용기를 내는 것이다.


 

 

슬픔의 밀물과 썰물


 

 

풀리는 한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잎풀 같은 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보라 함인가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한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이번 오피니언은 색다르게 시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이 시는 미당 서정주의 세 번째 시집 『서정주 시선』에 수록된 시편 「풀리는 한강가에서」이다. 시적 화자는 단순히 강물이 풀려나는, 즉 얼었던 강물이 녹아서 흐르는 것을 보고 있다. ‘풀다’라는 동사의 사전적 정의가 ‘묶이거나 감기거나 얽히거나 합쳐진 것 따위를 그렇지 아니한 상태로 되게 하다’라는 것을 볼 때 녹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녹는다’라는 표현 대신 ‘풀리다’를 선택하게 된 경로가 무엇일까? 단순히 시적 화자의 단어 취향일까?


‘풀다’의 사전적 정의에는 앞서 말한 것뿐만 아니라 ‘일어난 감정 따위를 누그러뜨리다’와 ‘마음에 맺혀 있는 것을 해결하여 없애거나 품고 있는 것을 이루다’라는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내적인 의미에 집중한다면 ‘강물이 풀린다’라는 표현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시적 화자 내부에 켜켜이 뭉쳐 있는 설움과 원망, 슬픔들이 얼음이 녹는 것처럼 녹아내리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처럼 외로이 “한평생 울고 가려” 했다. 여기서 화자가 울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은 “하늘의 얼음짱을 가슴으로 깨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얼음짱”은 강물이 풀리기 전의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응고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이 녹아내리는 것과 이를 깨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응축된 고통스런 감정을 없애고자 깨부수었지만 감정은 해소되지 않은 채 파편으로 잔존한다. 여전히 마음을 찌른다.


이와 달리 강물이 풀리는 것은 감정 주체의 의지에 따라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때문이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강물이 다시 뭉치는 것, 그러니 다시 부정적인 감정 형성되고 굳어지는 것 역시 주체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슬픔은 공기나 물처럼 가깝고도 보편적인 존재이다. 또 감정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분류할 때도 순도 100%의 기쁨과 슬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쁜 순간에도 슬픔은 비중을 달리 하며 우리 근처에 존재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슬픔을 비롯하여 원망, 열등감, 부채 의식 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을 마음 속에 품은 채로 견디며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것이 체념과 허무가 아니라 ‘그래도 살아야지’하는 의지로 귀결되는 것은, 언젠가 닥쳐올 슬픔이 무한정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슬픔이 도래해도 언젠가는 털고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제거하려 노력할 때가 아니라, 슬픔의 상태를 시인하고 그저 삶을 영위하는 동안 ‘적절한 시기’에 나도 모르게 감정은 해소되어 간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것처럼 우리는 늘 슬픔과 기쁨의 상태를 순환한다. 우리의 일상이 늘 기쁘지만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강물이 풀리어 햇살이 선사하기 때문이다. 야생의 땅에서도 자라고 꽃을 피워낸, 유약해 보이지만 비와 바람을 이겨내고 누구보다 강인한 민들레나 쑥잎풀 같은 것을 보면서 기특함과 자연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 황토 언덕의 꽃상여를 보면서 떼과부들의 슬픔을 어림짐작하고 동시에 속이 상하고 서글퍼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 순환을 조금 더 빨리, 기쁨의 상태로 촉진시킬 수 있는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슬픔 주변에 사는 인간으로서, 갑자기 슬픔이 우리에게로 돌진할 때를 대비해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놓는 일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슬픔을 대처하는 3가지 음악을 꼽아본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을 했던가? 슬픔을 준비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에는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슬픔의 순간을 잘 흘려보냈으면 하는 바람 역시 깃들어있다는 것을.

 

 


우제영.jpg

 

 


* 본문의 요약글은 <슬퍼하지마> (구원찬, 2018) 가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대표 이미지의 출처는 지니(genie)입니다.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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