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이란 이름으로 옭아매지 않는 여인의 초상 [영화]

나를 혐오하는 영화를 사랑했던 지난 날들에 대해
글 입력 2020.05.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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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퀴어 영화에 대한 첫 기억



고등학교 시절, 예술영화를 보던 친구 모습이 멋져 보였던 나는 그를 따라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불치병에 가깝다는 쿨-병에 걸려 버렸었다.(완치가 됐는지는 아직 의문) 그 때 처음으로 본 영화가 <패왕별희>였다. 몰락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개인을 그린 명작이지만 그 당시엔 '이-이이-잉'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영화로만 봤다.


그 영화를 첫 영화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퀴어영화였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주변엔 동성애자가 꽤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에 관심이 갔다. 레즈비언 영화는 퀴어 영화 중에서 소수에 속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장 유명했던 <패왕별희>를 선택했다. 사실, 기대했던 것처럼 퀴어영화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영화는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퀴어는 소재였을 뿐, 감독이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렇게 첫 퀴어 영화가 실패로 끝나자 오기가 생겨 닥치는 대로 다 봤다. 19금은 물론, 예술영화 / 상업영화 할 것 없이 퀴어 요소가 있는 작품이면 전부 찾아봤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퀴어 요소를 발견했을 정도니, 집착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재밌었고, 눈물을 쏟기도 했으며, 사랑에 빠진 적도 있다.


그런데 마음 한 켠엔 불편함이 있었다. 소수자 영화고 명작이라는데, 왜 나는 불편할까.

 


 

2. 소수자들의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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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가 없었다. 퀴어 영화판 역시 남성 중심의 '게이 영화'가 주류였다. 그 속에서 여성은 때때로 희화화 되거나 악역, 무지한 된장녀, 사이드킥 정도로 나오며 주변을 맴돌았다. 소수자 영화인데 배제된 소수자들 이야기로 인해 불편했다. 레즈비언 영화는 소수 중에 소수였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은 이 현상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나를 싫어하는 영화들을

좋아하며 살았다


- 셀린 시아마 감독


 

게이 영화는 나를 싫어했다.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서사에서 배제된 채 그저 스크린 너머를 사랑하는 짝사랑이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그걸 끝내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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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여자. 그 관계 속에서 여인의 능력과 재능은 뮤즈라는 이름으로 착취 당했다. 뮤즈는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화폭에 포착된 채로 누군가로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그곳에는 날것인 그들의 모습도,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능적으로 누워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뮤즈 개념을 깨고 모델을 공동 창작자로서 인정한다. 여성을 착취하지 않는 예술도 분명히 존재함을 온 몸으로 드러낸다. "그게 관행이야, 전통이야"라고 말하는 게으른 이들을 향해 선연하게 타오르는 여인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고리타분한 관행 따위 없어도 그들은 분명하게 타오르지 않나.

 



3. 나를 드러내는 사랑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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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수녀원이 나았어요. 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결혼보다 수녀원이 나았나요? 전 수녀원이 싫어서 나왔는데."

"당신은 꼭 결혼해야 하나요?"

"아니요"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질투, 욕망, 열정, 쾌락, 우정 모든 걸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여자가 되어 한 남자에게 귀속되어야만 한다. 자유롭게 나를 드러내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선명하게 서로를 그리던,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채 그 날의 들판, 침대, 시선, 몸짓, 표정을 기억한다. 타오르는 초상은 언젠가 다 타고 재만 남는다. 분명 끝이 있다. 그럼에도 타오르는 이유는 단 한 번도 타지 않으면 그 뜨거움을 알 수 없기에.


끝을 아는 사랑에 뛰어드는 그들은 용감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곳곳에 표식을 심어둔 채 서로를 사랑한다. 그리워하기보단 사랑하고 있단 말에 더 가깝다. 두 사람의 감정은 현재 진행형이고, 여전히 스크린 너머에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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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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