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향수 -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그래서 있었으면 좋겠다 [패션]

글 입력 2020.05.09 15:5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냄새와 향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진다. 냄새는 후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를 총칭하는 것임에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함에 비해 향기라는 단어는 한없이 긍정적이다. 결국은 향기도 냄새 중 하나일 뿐인데도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매력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이거 무슨 냄새야?”라는 한 문장으로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행복을 가져오는 이 냄새의 근원지를 찾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기분을 있는 힘껏 구겨버리는 근원지를 추적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다.


주변에서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연령대도 다양하고 쓰는 제품의 가격대도 꽤 넓다. 로드샵에서 출시하는 몇 천 원 밖에 안 하는 향수도 있고, 다양한 명품 브랜드에서 출시하고 드럭 스토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만 원 대의 제품도 있는가 하면 니치 향수라 불리는 몇십만 원을 훌쩍 넘어가는 고가의 향수도 있다.


향수를 뿌리는 사람도 중학생부터 성인, 중년을 거쳐 노년에까지 이른다. 가격이나 연령대가 다양한만큼 향수를 뿌리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안 좋은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향수를 뿌린다. 또 다른 이는 향기라는 보이지 않는 옷을 걸치고자 향수를 뿌리기도 하며 나는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lucas-benjamin-wq1BodC0TS8-unsplash.jpg
Photo by Lucas Benjamin on Unsplash

 


향기를 보이지 않는 옷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역사적인 기원 때문이다. 향수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까지 흘러가는데 당시 이집트에서는 가향 연고, 송진 등을 태운 연기를 제사장의 몸에 입히며 종교의식을 치렀다. 독특한 향을 내는 무언가를 태움으로써 신의 자비와 자애로움을 확인시키고 제사장의 육신을 정화하며 죽음이라는 신성한 존재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고고학자가 아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존경을 표하는 것이 아닌 어떠한 냄새를 통해서 그들이 대상에게 바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향을 입히는 행위를 통해 제사장이라는 존재에게 보다 높은 곳에 있는 존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고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마력



어떤 특정 인물, 사물, 상황, 또는 사건이 가지는 이미지나 분위기 따위는 얼핏 듣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탓에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시각이나 촉각 등 직접적인 자극에서 오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추상적인 것보다는 직접적인 요소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좋게 보자면 확실한 것만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보자면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후각보다는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되기에 냄새라고 하면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후각은 생각보다 직접적인 정보다.


 

natanni-PRlzJWDlS5E-unsplash.jpg
Photo by Natanni on Unsplash

 


후각적인 정보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다. 추상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 이 한 문장으로는 그 가치를 증명하기 힘들다. 우리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게 최선이고 글에 있어 ‘직접적’이라는 것은 ‘예시’를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 효과적이기에 이를 사용하고자 한다.

 


가 - 라벤더 향기가 나는 흰색 A4 용지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

나 - 하수구 냄새가 나는 흰색 A4 용지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



두 종이를 앞에 두고 있을 때 “어떤 종이가 더 매력적인가?”라는 질문에 대다수는 ‘가’ 종이를 선택할 것이다. 외관, 상황 등 모든 정보가 동일한 상황에서 후각 정보에만 의지해 위와 같은 선택일 내릴 것이다. 냄새를 제외하자면 모든 것이 동일한 두 종이기에 형성하는 이미지 또한 동일하지만 냄새라는 정보가 더해지면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공통적인 시각 정보가 아닌 차이점을 만들어내는 후각이 형성하는 이미지다.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공포라는 방어 수단에서 태어난 역겨움이라는 방어 작용을 지닌 우리 인류는 자연스레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가져오는 ‘좋은 향기’를 가진 대상에게 끌린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가정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후각으로부터 얻는 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이미지를 뿌리다



패션은 곧 이미지다. 내가 오늘 입은 옷, 바지, 아우터와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들고 나온 가방과 신고 있는 신발에 이르는 모든 것이 그 날 내가 마주칠 누군가가 나에 대해 그려낼 이미지를 좌우한다. 직장인 패션이나 새내기 룩 따위가 연 초만 되면 각종 검색 포털 창에 오르내리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패션이 이미지를 좌우한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안경을 낀 사람을 보면 공부를 잘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주변에서 쉽게 보기 힘든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예술 분야에 종사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패션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에 벌어지는 사고 회로의 작용이며 이 과정의 끝에 놓인 것인 향이다.


 

joost-crop-vqUUQ96GsME-unsplash.jpg
Photo by Joost Crop on Unsplash

 


향수는 옷과 액세서리를 녹여 한 병에 담아낸 농도 짙은 패션의 농축액이다. 에로스, 블랙 오키드 등 그 향수에 담긴 이미지를 상징하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향수는 탑, 미들, 베이스라는 3단계의 노트(Note)에 따라 계속해서 그 향기가 변하며 다양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노트의 변화는 걸치고 있던 아우터를 벗거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처럼 옷으로 낼 수 있는 효과와 같다.


다만 옷과 달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향수의 연출은 뿌린 사람도 그 향을 맡는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를 바꿔놓는다. 검은색 셔츠와 검은 슬랙스의 조합에 잘 길들인 가죽 첼시 부츠를 입고 검은 메탈 시계를 찬 남성이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쯤 풀었다. 이 한 문장의 묘사는 읽는 사람으로 금하여 섹시하고도 농익은 매력을 가진 이를 그려내게 만든다. 그 남자는 통카 빈, 바닐라, 베르가못이 섞인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긴다. 향기를 더하는 이 묘사로 하여금 그 남성의 섹시미는 한층 짙어지며 완벽하게 마무리된다. 향수가 패션의 시작이자 전부가 아닌 완성인 이유다.


원래는 향수를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강한 향에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울 때가 많아 되려 향수를 뿌린 사람마저도 기피했었다.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언젠가 만났던 사람에게서 무척 좋은 향기가 났었고 그 사람으로 인해 지금처럼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 사람 덕분에 여지까지 내가 접했던 향기라는 것은 질 나쁜 인공적인 향이거나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거나 또는 제대로 뿌리지 못 한 향수였기에 그토록 불쾌했음을 배웠다.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은 향수가 나라는 사람의 외적인 표출을 마무리할 수 있는 훌륭한 붓임을 알려줬다.


패션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하의 와 겉옷 같은 메인 아이템은 나 또는 당신이 그릴 그림의 기본 스케치를 완성한다. 스케치만으로도 그 맛이 나는 그림도 있지만 채색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딘가 심심한 그림도 있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 채색을 한다. 손목시계나 반지, 가방 같은 여러 가지 액세서리를 더한다. 채색까지 끝냈지만 어딘가 아쉽다면 질감까지 연출한다. 향수로 내가 원하던 이미지를 보다 짙게 물들인다. 이 모든 것은 패션이라는 기법으로 나라는 자화상 또는 상상화를 그려내는 과정이다. 질감 처리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듯이 향수 또한 꼭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더해진다면 보다 맛이 살아난다. 없어도 괜찮지만 왠지 없으면 허전한 것이 향수의 매력이다.

 


[김상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