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야 할 때, 증언해야 할 때 - 아이 캔 스피크, 2017 [영화]

글 입력 2020.05.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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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i Can Speak, 2017


감독 : 김현석

배우 : 나문희, 이제훈

 

명진구청으로 새로 발령받은 민재는 지난 20년간 온 동네를 휘저으며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은 민원왕, 일명 도깨비 할매 옥분을 만난다. 두 사람의 대립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어느 날, 민재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알게 된 옥분은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옥분의 영어 선생이 된 민재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가족이 되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그마한 오해로 두 사람의 사이는 걷잡을 수없이 벌어지고, 민재는 그녀가 과거 일제의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삶에는 두 가지 순간이 있다.

살아야 할 때와 증언해야 할 때이다.”


by.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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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국제 엠네스티 한국지부는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천437차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에서 일본군 성 노예제 피해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였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께 언론상 특별상을 수여하였다. 2020년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18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렇듯 야속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아베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기미가 없다.


오히려 작년 7월에는 강제징용과 관련된 대법원 판결을 두고 불만을 제기하며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안타깝고 화가 치민다. 하루라도 빨리 일제강점기 당시 고통을 받았던 모든 분들이 응당 받아야 할 사과를 받길 바란다. 한편 마침 5월이 생신이기도 하셨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를 다시 한번 추모하고 다시는 이런 반인륜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은 그녀들의 영화 한 편을 가져왔다. 바로 <아이 캔 스피크>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 하원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증언했던 ‘이용수 할머니’의 실화를 다룬다. 물론 단점이 하나도 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생각보다 임팩트를 발휘하지 못하고, 큰 줄기를 메꾸는 작은 아이디어는 이상한 유머감각으로 가득 차 있어 당황스럽다. 청문회 장면에서 부적절한 언사를 내뱉는 미국 의원들을 향한 누군가의 ‘Stupid' 같은 대사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지나친 강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아이 캔 스피크>는 적어도 내가 아는 위안부 소재의 영화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품위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일본을 향해 분노할 줄만 알던 여타 위안부 소재 영화들과 달리 <아이 캔 스피크>는 이분법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반성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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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을 떠올려 보자. 'I can speak(나는 말할 수 있다).' 이 문장에는 기본적으로 능력이 전제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영화 속에서 다른 인물들이 그렇게 부르짖던 것처럼 ‘증언을 할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오로지 말하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뿐이다.


영화 속에서 나문희가 연기한 ‘옥분’은 과거 부모님에 의해 위안부로 살아온 과거를 침묵하고 부정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생각건대 이는 그녀가 동네에서 도깨비 할매로 불리며 민원왕이 된 이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침묵함으로써 입을 수 있는 상처와 아픔을 알게 된 그녀는 불합리한 일에 대해 ‘민원’을 넣음으로써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두 부류가 나타난다. 한 사람은 영어를 취업을 위한 등용문으로 삼는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영어는 말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영어의 본래 역할이 소통을 위한 언어임을 감안할 때 어느 쪽이 이상주의고, 또 어느 쪽이 현실주의인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아이 캔 스피크>는 ‘한 남자의 성장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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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이제훈이 연기한 ‘민재’의 변화는 단순히 한 개인의 변화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민재는 지역의 유력인사의 이권을 위해 시장 상인들을 몰아낼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을 알려준다. 민재의 상사인 양팀장은 ‘공무원 신조 몰라? 나대지 말자! 복지부동!’이라며 현실에 안주할 것을 주문한다. 하물며 옥분의 부모조차 하나뿐인 아들의 장래를 위해 딸의 상처를 감추기로 택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이들은 변한다. 조용히 살기를 바랐던 부모의 바람과 달리 옥분은 증언하기로 결심한다. ‘옥분’의 사연을 알게 된 민재는 구청 직원들과 힘을 모아 그녀가 증언대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구청장 역시 ‘옥분’의 위안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자의반 타의 반으로나마 힘껏 나선다.

 

영화 속에서 민재는 왜 서른을 넘긴 그 나이에 여태껏 결혼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때를 놓쳐서요’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진보라는 건, 변화라는 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의 결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이 캔 스피크> 속 인물들의 변화는 더 이상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공동체의 반성이자 의지다. 그들은 더 이상 지난 시간처럼 그녀에게 ‘침묵’하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의 ‘증언’을 응원하고,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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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아카데미 시상식'하면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세계를 휩쓸었던 2020년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미국인들에겐 아마도 2018년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누군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마다 숱한 감사를 전해 들었던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2017년 용기 있는 그녀들로부터 촉발된 ‘미투’로 인해 올해 3월 뉴욕 법원으로부터 2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해에는 흑인 배우가 주연을 하고 흑인 감독이 연출한 슈퍼히어로 영화인 <블랙 팬서>가 개봉하여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마찬가지로 흑인이 주연과 연출을 차지했던 <겟 아웃>은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여성 영화인들의 행보도 두드러졌다.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레이첼 모리슨은 여성 최초로 촬영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이를 두고 사회자인 지미 키멜은 그 해,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서 ‘유리천장의 종결’을 선언했다. 한편 우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한국 영화 속 조선족 등의 이방인들은 대부분 범죄와 관련된 인물로 등장한다. 여성을 다루는 방식도 비슷한 처지다. 여성 캐릭터가 메인 롤로 등장하는 영화도 드물다. 그/녀들은 여전히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 뿐이고, 영화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감초로만 그친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한국을 강타했던 미투 행렬을 떠올려 본다. 당시 나는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TV에서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던지던 말들이 떠오른다. 이제 좀 그만하라는 둥, 지겹다는 둥. 저열한 농담을 내뱉으며 낄낄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 작년 말 할리우드의 여배우들로부터 출발한 ‘미투’는 불과 몇 개월 만에 90회까지 이어지는 동안 군림해왔던 아카데미의 오랜 편견을 깨부숴 버렸다.


물론 ‘미투’만의 힘은 아닐 것이다. 그 이전엔 ‘남성 배우들과의 불합리한 출연료 격차를 고발하는 용감한 여배우들이 있었고, 더 이전엔 페미니즘과 흑인 민권운동, 시민혁명 등이 있었다. “삶에는 두 가지 순간이 있다. 살아야 할 때와 증언해야 할 때이다.”라고 말한 이는 알베르 카뮈였던가. 카뮈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맨 앞에 말했던 그들은 모두 ‘죽은 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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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의 상어는 부레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고 한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삶이다.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여유가 상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어에게 정지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대가로 상어는 ‘삶’을 얻는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나아가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증언해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1000년 전의 사람들에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러한 비웃음 속에서도 이상을 품고, 증언하고, 행동에 나섰다. 그런 이들이 모여 시민혁명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얻었다.


그러니 잊지 말자. 증언의 무게를. 그것이 불러올 변화를. 어쩌면 우리가 지금 느끼는 불편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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