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非미적 현실에서 미 - 예술과 나날의 마음

글 입력 2020.05.0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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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예술과 나날의 마음>은 에세이 형식으로, 작가와 작품에서 얻은 저자의 통찰이 여러 단편과 주제로 엮여 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읽은 문장들이 하나의 주제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식대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의 꿈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절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사람들과 행위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과 행위가 있어야 한다.”

 

 

단호해서 아프지만, 그만큼 타협 없는 사실 혹은 진실이란 반증일 테다.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좇을 수 있을까. 왜 그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한 가장 큰 단서는 두 가지 같다. 하나는, 사라진 낙원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현실을 형상화한 결과의 작용에 관해서다.

  



사라진 낙원 vs 삶의 형상화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더 나은 삶에 대한 그리움을 접을 수 없다면, 그 그리움은 간직되어야 한다. (333)

 

  

낙원은 사라졌다. 전쟁, 기아, 폭력, 어쩌면 지루하고 고된 일상까지 포함하여. 희한한 건 그리운 마음이다. 사라졌다는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는데도, 왜 ‘더 나은 곳’을 향한 그리움을 접을 수 없는 걸까. 발 딛은 곳은 황량한 폐허지만, 바라보는 곳은 손이 닿지 않는 푸르른 하늘이다. 실로 슬프다. 고개를 내릴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하나.

 


더 이상 이 땅에서 낙원 실현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상실된 낙원에 대한 기억이고 표현이며, 이 시적 표현 속에서 시도되는 또 다른 방식의 실천적 가능성이다. (250)

     

 

사라진 낙원에 서서, 다시 낙원을 꿈꾸는 일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과 폭력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고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하여 생애 끝까지 오래도록 음악을 놓지 않으며 본질을 찾았던 루치지코바,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에서 색다른 감흥을 주는 페르메이르와 샤르댕, 도시의 우울과 쓸쓸함을 그대로 품은 호퍼 등의 경우가, 위의 행위는 모순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걸 증명한다. 이유가 있다.

 

 

사람이 상징물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 삶이 이중의 차원에 걸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상징과 현실 속에 산다는 말이고, 동시에 지상과 플라톤적 이데아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특이한 것은 이 두 차원이 일상적 삶에 항시 출몰하고 교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죽음과 삶의 차이를 분명히 의식하고, 삶에 집중하고 그것의 형상화를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법이다. (172)

 

  

지상과 이데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면, 더 정확히 우리는 ‘겹쳐진 세계’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이 겹쳐진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무엇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다. 바로 형상화된 삶이다.


표현된 형상 자체가 이데아는 아닐 것이다. 이데아는, 낙원은, 형상을 보는 사람의 사고에서 다시 펼쳐져야 한다. 예술은 매개일 뿐이다. 그러나 그 매개가 없다면, 문을 열 수도 없을 것이다.

 

 

감정의 내용은 그 자체로 파악되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 틀을 만드는 것, 그것이 ‘형식화’다. … 감정의 거친 내용이 의미의 보다 일관되고 유기적인 질서로 변모하는 것은 이런 여과/추출의 과정을 통해서다. … 화가나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세계를 창조한다면, 우리 수용자는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세계를 기존과는 다르게 느낀다. (274)

 

 

형상화를 통한 형식화, 즉 ‘고양’의 과정을 거친 예술은,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마주해서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이는 곧 ‘시적 표현’이며, 예술작품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감지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즉 예술의 형식화는 수용자의 감각과 사고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열쇠인 것이다.


이렇듯 예술은, 명령과 교설과 논증이 힘을 잃는 영역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고귀함으로, 불순한 현실에서 순수로. 예술의 존재 이유를 단순한 감성 충족으로 말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있다.


 

 

타협 없는 싸움


 

  

삶의 활동에 근본적인 것은 복원일 것이다. 어떤 복원인가. 그것은 행복의 편린을 만들고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 그리하여 삶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편안하게 숨 쉬면서 우리의 꿈과 그리움을 더 넓은 미지의 공간으로 번져나가게 하는 것은 삶의 근본적 활동인 것이다. (104)

 

  

왜 예술해야 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에 저자의 성찰을 인용하면 나의 이유는 '복원'이다. 숨 쉬기 위해서다. 복원하는 일로써 예술,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는 일.

 

그런데 종종, 지속하려 노력하지만 ‘쉽게 포기해도 되는’ 일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어쩐지 의무가 아닌 일처럼. 아픈 병을 고치거나 돈을 벌고 당장의 허기를 달래는 일 보다 급하지는 않은. 타협은 가장 사소한 속삭임에서 온다. 급하지 않잖아, 당장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잖아? 오늘은 지나가자.

 

안락함은 달콤하다. 그런데, 한없을 것 같던 달콤함 뒤에는 일기장에서 백지가 된 채 사라져버린(복원할 수 없는) 어제와 정신적 무방비 상태에서 맞아버린 허망한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남는다.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은 “우리의 꿈과 그리움을 더 넓은 미지의 공간으로 번져나가게 하는” 삶의 근본적인 활동, 예술은 결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연단에 가깝다.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이 모든 일과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기로 다짐하는 일까지.

 

창작이든 감상이든, 시작은 본능(혹은 재능)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속'은, 끊임없이 나를 달래고 안간힘을 부리는 나날의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협하는 순간, 거기서 끝난다.

  


*

예술과 나날의 마음
- 예술로 삶을 사랑하는 방식 -


지은이 : 문광훈

출판사 : 한길사

분야
인문
미학/예술철학

규격
148*210mm 양장

쪽 수 : 344쪽

발행일
2020년 02월 28일

정가 : 19,000원

ISBN
978-89-356-6338-5 (0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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