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편지를 쓰고 싶은 기분 [사람]

글 입력 2020.05.0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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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끼고 쉬는 숨이 갑작스럽게 무겁고 더워졌다. 여름은 그렇게 예고없이 왔다.

 

채운 것 없이 지나가버린 시간은 나를 추 없는 시계처럼, 중심 없는 주변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게 한다. 닥치는 대로 욱여 넣어서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무거워지기만 한 몸은 축 늘어져 너그러운 웃음만을 흘린다. 괜찮아, 자조적인 웃음은 너그러움과 관대함으로, 사람 좋은 넉살로 포장되어 따뜻한 인간의 표본인 양 연기한다.

 

여름이 되면 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먼길을 돌아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채우고 채웠는데도 비어버린 너와 나는 깨진 독이라도 된 듯, 그렇게 텅 빈 울음소리만을 낼 줄 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은 입구에서 뱅글 돌며 부우부우- 우울한 신음을 하고는 떠난다. 우리는 늘 만나면 우는 소리를 했다. 공부가- 인생이- 미래가-, 부우부우 하며 울어댔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너를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도 울음을 연기하는 것이 꽤나 지치는 일이 되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너는 너의 방식대로 자라나고 있었겠지. 나는 끓어 오르는 바쁜 속을 달래느라 매사 지쳐있고 성급했다. 편협한 시각으로 단정짓는 것이 익숙해졌으며 큰 노력없이도 편한 관계만을 지속했다. 너를 만나면, 나는 이런 나를 줄줄이 설명해야 했다. 우리는 그만큼 멀리, 오래 떨어져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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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꽤 빈번히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우표를 사서, 붙이고 우체통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하면서도 어떤 편지 봉투에 어떤 내용이 담겨 올지를 기다리며 신나했다. 장롱 서랍에는 커다란 홍삼 박스가 있다. 홍삼 박스를 가득 채운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쪽지들.


이 편지와 쪽지를 자양분 삼아 자라났을 것이 분명한 내가 (홍삼 마시는 것은 자주 걸렀으니) 이제는 편지지를 고르는 것 조차 피곤해 한다. 내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아, 사치라기 보다는 오히려 쓸모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다고 네가 내 마음을 알까, 글로 적지 못하는 내 마음을 네가 지레짐작하는 것이 싫었다.


너에 대한 염려와 애정은 이미 녹은 젤리처럼 방바닥에 퍼져 붙어버렸다. 절절 끓는 바닥에 나도 같이 누워 한데 엉켜 붙었다. 의자를 끌어 앉아 볼펜으로 내 이야기인 척 하는 네 이야기를 쓰는 게 힘겨웠다. 너에게 가야할 안부와 애정어린 말들은, 어제 꿈에 나온 괴상망측한 이야기들은, 그제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에 대한 찬사는 내 입가를 지나기도 전에 녹아 없어졌다.

 

그런데 어제는 편지를 쓰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편지를 쓰고 싶다. 편지를 써서 너에게 부치고 싶다. 어제도 쓰지는 못했다. 눅진한 공기와 쩍쩍 달라붙는 발바닥에도 나는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나는 이것이 무슨 삶의 희망이라도 되는 양 이런 기분이 든 것이 기뻤다. 특별히 기분 좋은 일이 있던 것도, 신세한탄을 하고 싶던 것도 아닌데 이유없이 네 편지에 답장을 하고 싶어졌다. 네가 너에게 했던 의심에, 걱정어린 고백에 위로와 또 다른 나의 고백과 다짐을 적어 내려가고 싶었다.

 

편지가 쓰고 싶다. 빳빳하면서도 결이 우둘투둘한 편지지를 사서 잘 깎은 연필로 편지를 쓰고 싶다. 서랍에서 썩고 있는 테두리가 노랗게 변한 스티커를 붙여 봉투를 여미고 잘 닦은 손으로 우체통에 퐁당 편지를 넣고 싶다. 나는 이게 어떤 삶의 열의처럼 느껴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오는데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스파크를 느꼈을까.


네가 보냈던 편지가 어쩌면 나를 두드리는 비일지도 모른다. 꽉 닫힌 창가를 마구 두들기는... 나는 비가 그쳐야만 창을 열텐데도 비는 창을 마구 두드린다. 지쳐 떠나면 그제야 내가 창을 열고 맑은 하늘에 감탄하겠지. 어제는 내가 창을 열었던 날인가보다. 나 이제는 비 오는 날에도 창을 조금을 열어둘래, 다짐한다.

 

여름이 왔으니 곧 너도 온다. 내가 얼마나 너를 걱정하는 겨울과 봄을 보냈는지, 네 웃음을 아파했는지, 너의 행복을 바라는지 편지에 가득 써서 너에게 줄테다.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 하나둘 떠오르는 저녁이다. 숨지 않고 용기내어 내 마음을 모두 줄테다. 답장이 오든 오지 않든, 나는 그냥 편지지를 골라볼 셈이다. 몽근하고 부드러운, 따뜻한 공기가 내 주위를 부유하는 여름이 왔다.

 


[황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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