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일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10개월간 일하며 든 생각
글 입력 2020.04.2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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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가 이메일 한 통을 쓰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린 적이 있다. 무언가를 부탁해야 하는 이메일이었는데, 승낙은 고사하고 답장조차 못 받을까 걱정이 되어 내용을 다듬고 또 다듬느라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어떤 식으든 나의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좀처럼 쉽게 '전송'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며칠 후, 그 메일은 거절의 의사가 담긴 답장과 함께 돌아왔다. 정중한 내용이었음에도 공들여 썼던 만큼 허탈했다. 일하면서 생기는 소소한 일화일 뿐이지만, 쌓이고 쌓이면 그렇지 않다. 요즘에는 일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때보다 좌절하고 무력함을 느끼는 때가 더 잦다.


정식으로, 그러니까 주 5일을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한 지도 10개월이 넘었다.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일이었고,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시간도 그렇게 얼떨결에 흘러갔다. 처음 정신 없이 일을 하던 때는 지금쯤의 나 자신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때는 분명 10개월차에 걸맞은, 나름대로 일이 익숙한 직장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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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10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그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인 기분이 든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10개월은 일에 익숙해지는 것 이상으로 나의 취약한 부분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나는 한 사람인데 일이라는 필터를 적용하니 또 다른 내가 보였다.


일단 나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평가받는 걸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려워한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치는 걸 싫어하지 않아 몰랐는데,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또 누군가한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을 힘들어한다. 작은 회사인 데다 업무 특성상 여기 저기 아쉬운 얘길 해야 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음으로, 나는 일에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다. 갑작스럽게 시작하긴 했으나 이전에도 생각해본 분야의 일이였기 때문에 나는 내 일에서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해보니 내가 만들어내는 것들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자주 휩싸인다.


물론 장점들이 있고, 그 덕에 지금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장점과 상관없이 단점은 단점대로 선명하게 존재감을 뽐내며 매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하는 시간은 제쳐놓고 퇴근 후나 주말에 다른 일로 활력을 얻겠다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그럴 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게다가 최소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어떤 조건에서 일을 하면 지금보다 행복할지를 따져본 적이 있다. 한참을 따져보니 내가 원하는 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은 형상이 되었다. 그러자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싫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닐 텐데, 과연 일이라는 걸 하는 동안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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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런 생각에 골몰하다가, 최근에 <딴짓 좀 하겠습니다>를 읽으며 문득 내가 너무 '어떤 일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좁은 범위의 질문에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오늘날의 직업은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단지 지금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일은 일정 기간 동안 나를 담는 그릇이 되어줄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업무상 무언가를 거절당한다 해도 나 자신이 거절당하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내게는 어릴 때부터 믿어온 일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 그 신화란, 일이야말로 자아 실현의 꽃이며, 나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일에서 대단한 보람을 얻기를 기대했다. 일을 그저 밥벌이로만 여기는 사람들을 남몰래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일과 나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일을 하며 자괴감을 느껴던 순간 중 하나는 내가 일로써 만들어내는 것들이 내 마음에 안 들고,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들의 결과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고 느낄 때였다. 따져보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도 분명 지지부진한,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의 과정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모든 일의 결과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으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일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것들이 맞아떨어져 가끔 아주 멋진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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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을 하는 동안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느냐 못지 않게 어떻게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 또 어떤 태도로 일할 것인지와 더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안타깝게도 몸으로 부딪히고 느끼며 나름대로 정리해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올 때, 대학을 갈지 안 갈지, 간다면 어떤 전공을 택할지 무언가를 잘 알아서 정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조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도 자기가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시야는 늘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상자 속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맞추는 놀이처럼, 모르는 채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이라는 게 무언가 하나를 골라서 탑을 쌓듯 착착 커리어를 쌓아 올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다. 일의 형태가 다양해지는 미래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세상이 급하게 변하는 동안 나 역시도 변할 거라고 생각해보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예상하기는 더욱 힘들다. 어느 날은 어렴풋이 그려지다가도 다른 날에는 전혀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조차도.


이런 세상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특정한 업무에 능숙해지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는 과정의 연장선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곧 일과 동일시되는 게 아니라, 일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다른 세상을 탐험해나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여러 일을 경험한 나는 시작 지점에 서 있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전히 헤맬지라도, 그 헤맴에 행복한 구석이 있다면 좋겠다.

 


[김선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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