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하루의 길이

내겐 너무 버거운 하루
글 입력 2020.04.16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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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길이


 

학생 때는 하루가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시험기간이면 까마득한 시험 범위에 책상 앞에서 한참을 붙어 있다가 새벽이 되면 잠에 들곤 했고, 어떤 때는 거의 날을 샜다. 나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사람이라 하루를 시험공부로 채우고 잠드는 게 싫어서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관심사를 살펴본 뒤 잠에 들었다.


그거라도 해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든 하루에 욱여넣었다. 그래서 시험기간만 되면 하루에 몇 시간만 더 이어붙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바쁜 생활을 하다가 방학이 시작되면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부지런을 떨었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지키지도 못할 계획만 늘 새롭게 세웠지만, 무언갈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쓸데없이 바쁜 날들이었다.


그렇게 늘 무언가로 채워지던 날들을 지나, 짧은 첫 직장생활을 끝내고 다시 취준생이 되었던 그때. 나는 조금씩 무기력해져갔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잤다. 잠을 자는 것 말고는 하루를 줄일 방법이 없었다. 잠은 하루를 짧게 끊어줬고, 잠에 빠진 나는 현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가 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쳤다. 힘들어서 긴 하루가 아니라 길어서 힘든 하루가 매일 같이 이어졌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루조차 제대로 살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하루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저마다 열심히 살아가는데 살아 있기만 한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삶을 지루해하고 싶었는데, 삶이 나를 지루해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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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취직을 했다. 9시부터 6시까지의 업무시간과 출퇴근 시간, 그리고 출근 준비 시간. 하루의 절반 가까이 일을 하기 위해 쓰게 되었다. 쓸 데가 많은 하루면 삶이 나아질 줄 알았다. 이미 한 번 해봤으니 일 한다고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할 일이 없는 하루와 아닌 하루의 차이가 크니까 삶에 활력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이 내 삶의 에너지를 가져갔다.


취직하고 세 달 가까이는 예상한 대로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나태함에 빠져있던 몸을 끄집어 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신입으로 회사에 적응하기까지, 무슨 큰 일이 있지 않아도 피곤했다. 딱 세 달만 피곤해하고 운동을 시작하자고 마음 먹었고 실현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내 시간을 갖겠다고 늦게 잠들지 말고 컨디션을 위해서 일찍 자는 날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런 다짐이 필요도 없게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날이 이어졌다. 씻고 나와 잠시 늘어져있다 잠에 들고, 두어시간 뒤에 일어나 머리를 말리고 다시 자는 일이 반복되었다. 남들은 불금을 보낸다는데 나는 금요일만 되면 일찍부터 꾸벅꾸벅 졸았다. 여전히 하루가 버거운 날들이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환절기 잠깐인 줄 알았는데 한달 가까이 면역력이 바닥을 쳐서 나도 모르는 ㅅ 사이 잠에 들고 금요일에는 일찌감치 곯아떨어진다. 면역력과 피로의 콜라보로 이곳저곳 염증 반응이 나타난다.


내가 사는 내 생활이고 삶인데 참 가지가지한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스갯소리로 이젠 영양제 챙겨먹을 나이라고 했는데, 이젠 진심으로 영양제들 꺼내서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다. 내가 어떻게 작년 겨울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 작고 소중한 차가버섯 가루에 먼지를 쌓이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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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힘들 수가 있다. 저녁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녁을 버틸 체력이 없는 삶이 먼저 찾아왔다.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내가 노력하고, 다음 계절을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루를 잘 살아내는지 모르겠다. 일단 살고보자. 그러다보면 하루를 잘 견뎌내는 날이 오겠지. 그러다 삶에 볕도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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