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행복하지 않아도 꽤 살만해요. 나 알아가기.

당신은 행복한가요?
글 입력 2020.04.1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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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행복한가요?


경기가 나날이 악화되고 인구수만큼의 갈등과 다툼이 벌어지는 작금의 시대다. YOLO와 워라밸, FLEX 같은 개념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기보단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이면에는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난과 빈부격차가 숨어있었다.

사람들이 지갑을 열기 주춤거리자, 기업들은 라이프스타일을 억지로 바꾸고 선도해나가기로 했다. 삶, 현재, 행복 등의 달콤할 말로 사람들을 부추기면서 어떻게 보면 미래까지 저당잡는 소비를 짜내고야 만다. 영악한 마케팅은 행복이라는 따뜻한 단어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행복이 여러 가지 말로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데 반해, 불행하다는 말은 찾기 어려워진 것 같다. 드라마에서야 주인공들이 불행하다고야 말하지만, 행복의 선행과정과도 같다. 사이다를 터뜨리기 전에 꽉꽉 눌러먹는 고구마와 같다. 드라마는 적당한 지점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게 트렌드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해피도, 죽기 전까진 엔딩도 없다. 드라마 같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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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불행하다는 말 자체가 광범위하다. 불행. '행복하지 아니함'.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 걸까? 미디어에서는 행복이 예쁘게 포장되어 나오고 광고 속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행복을 권유한다. 행복하지 않은 나는 그걸 삐딱하게 바라본다. 나, 불행한 사람인가 봐.
 
짧은 사색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행복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꼭 행복해야 할 것만 같이 군다. 근데 그렇게 얻은 행복 중에 진심으로 감화된 행복이 있을까 의문이다.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거나 확신하며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그 의문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그저 익명을 빌려 조심스럽게 기다 아니다 전달할 뿐이다.
 
예비사회인 과정을 밟고 있는 요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본다. MBTI 성격검사도 해보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결론은 대학 졸업이 가까워지고 본질적인 독립이 시작되는 시기에도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다시 이번엔 조금 더 진득하게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주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것부터 훑어보기로 했다. 글의 시작이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지금까지 행복해왔나?
 
 

행복을 찾아서

 

두 분은 자주 싸웠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서울에서 시골에 내려왔다. 가정을 먹여살리려고 내가 한창 어릴 때부터 맞벌이를 시작했다. 아빠는 자기가 일하지 않아도 집안이 굴러간다고 생각했나 보다. 점점 일 나가는 횟수가 줄었다. 엄마가 평일에는 회사일 주말에는 알바를 뛸 동안 아빠라는 사람은 어업을 한다고 대출을 끼고 몇억짜리 배를 샀다. 대출이자에 허덕이다가 더 싼값에 팔았다. 언제는 농사짓는다면서 몇천만 원짜리 트랙터를 샀다.
 
엄마가 집안과 일 두 가지 아득바득 해내려고 지금 내 나이 때부터 일하기 시작했을 때, 아빠는 모임을 다녔다. 작은 지역사회에서 그렇게 많은 모임이 있는지 알기 싫어도 알게 됐다. 취해서 귀가한 아빠는 꼭 엄마한테 밥을 찾았고 엄마는 밥을 해줬다. 집안은 기울어가는데 소득은 없는 명예직함만 달았고 다른 사람들만 챙겼다. 다른 사람에겐 호구였지만 가족에겐 남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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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감정 돌리기 게임이 시작됐다. 아빠는 엄마에게, 엄마는 내게 돌렸다. 게임에서 내 다음 타자는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감정 해소하는 방법을 몰라서 나는 속을 삭혀야만 했다. 사춘기도 누릴 여유가 없어 조용히 지나갔지만 제때 누리지 못한 사춘기는 뒤늦게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벌받은 것처럼 몸 여기저기 아파졌다. 눈 수술을 했고 호전되기는커녕, 양쪽 눈 모두 수술하고 안약을 넣고 약을 먹어도 현상 유지가 고작이었다. 이성을 잃은 채 다른 곳에 눈을 돌린 벌인가 보다. 우리는 드라마처럼 통쾌해할 순 없었다. 그 벌의 무게마저 나눠 짊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 남매와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 엄마 아빠는 항상 돈이 없다고 내게 얘기했고 나는 어릴 때의 어릴 때부터 그 소릴 듣고 자라서 항상 남은 돈과 통장 잔고를 보는 게 습관이었다. 뭔가 돈에 대해서 항상 절박한 것 같기도 하다. 필사적으로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했고.
 
스무 살, 아무것도 모르지만 법적 책임은 져야 하는 나이가 됐다. 드디어 독립했건만,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등록금과 방값은 언제나 고민이었다. 학교 기숙사 비롯해 온갖 지역 기숙사를 찾아보고 장학팀 홈페이지는 즐겨찾기해두고 매일 방문했으며 학기 중에는 근로 알바, 방학에는 집에 내려와 알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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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관해서는 스무 살 한참 이전부터 책임감을 가져야만 했다.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로 전공, 학교와 상관없이 대학에 지원했고 그 대학에 떨어진 다음에는 마음 추스를 새 없이 장학금과 알바를 알아봤어야 했다. 항상 친구들이 당연하게 부모님에게 요구했던 것들도 내 선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도저히 안돼서 돈 달라고 말할 때마다 철없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몸이라도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게 유머다. 자잘한 잔병치레와 왜소한 덩치, 아토피피부염 등 어디 내놓고 건강하다고는 말 못 할 몸으로 태어났다. 온갖 가공식품은 당연히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다. 어린 나이,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몰래 숨어 먹을 때마다 간지러워서 긁었다. 잠 못 잘 때마다 엄마는 속상해했고 난 그런 엄마 때문에 숨이 막혔다. 간지러운데 긁을 수 없는 고통 끝에는 억울함만이 남았다.
 
 
 언제 한 번이라도
깊게 잘 수 있는 날이 올까?
 
 
굳이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고 괜찮은 척 행동했다. 갈등을 피하려고 눈치 보고 챙겨주고 했었다. 나랑 친해지기 전 사람들은 내가 한없이 밝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굉장히 놀랬으며 한동안 그런 이미지를 즐기기도 하고 유지하고 싶어 했다.
 
 

행복하지 않아도 살만하더라

 

솔직하게 생각해보니 나란 사람, 성격 파탄자 같다. 행복했던 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지만 불행하지는-완전 최악의 뜻으로써- 않았다. 이따금 우울했지만 우울증에 걸릴 정도는 아니었고, 스트레스 받는 날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성격이 무딘 편이 아니고 낯선 곳, 낯선 사람 적응하는 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개복치 같은 성격이다. 혼자 짜증 내고 갑자기 우울하고 상당히 예민한, 괴팍한 사람.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고 힘들어하지만 적당히 만날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걸 반기는 사람. 발표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해야 될 때는 어떻게든 하긴 하는 사람.
 
뭐 특출나게 잘하는 거나 재능을 보이는 것도 없다. 스트레스 받는 것에 비해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뭐 해 먹고 살지 고민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살았고 살고 있다. 지적받으면 하루 종일 한숨만 쉬고 힘들어한다. 작은 칭찬 하나라도 받으면 피식피식 웃으며 하루 종일 생각한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으면서도 바로 작년의 나와 비교해보면 조금이라도 성숙해진 것 같고. 남들과 똑같이 달리고 싶어 조바심이 나서 우울하다가도 곧잘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내가 별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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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화목한 가정에서 유복하며 자라며, 분기별로 해외여행을 가거나, 돈 걱정 없이 꿈을 좇거나 가족과 찍은 화목한 사진을 sns에 올릴 때마마다. 저마다 다 짊어진 고민이 하나씩은 있겠거니 하고 한 번쯤 부러워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나를 부러워할 수 있으니 말이다.
 
두 번의 사색은 정답이 아니더라도 답을 알려줬다. 애매한 내 삶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행복한 건 아닌데 살만하다는 것이다. 어찌하다 보면 하루는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지겹고 끔찍했던 오늘도 잠자고 나면 어제였다. 그래도 살만하다. 행복해져야 한다거나 행복하다거나 그렇지도 않지만. 조금 더 인정함으로써 살아간다. 나 같은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행복하진 않은데 불행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내가 날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수를 하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해도, 못난 사람이어도 나는 나니까 살만했다. 상황에 불평불만은 많아도 나에 대해 불평하지는 않았으며 그래서 불행하지 않았다. 굉장히 뻔한 인터넷 명언 같다.
 
나를 인정함으로써 나를 알아가는 기분은 꽤나 나쁘지 않았다. 없던 자기애가 솟아나는 기분이고.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었다.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행복해질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닐까? 물론 행복이나 행복한 사람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는 데 굳이 행복을 애써서 좇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혹시라도 내게 행복이 찾아온다면, 온 몸으로 마중나가면 그만이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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