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 도서 '장벽의 시대'

글 입력 2020.04.1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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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브렉시트 사태가 터지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탄생한 해. 그 해 겨울 한국은 매일 이어지는 촛불 시위의 행렬로 빛나고 있었고, 나는 한창 인문학에 빠져 있었다. 전공 공부를 가장 많이 하던 시기였고, 학술적 고민이 마땅히 학생으로서 주어진 '의무'이기도 했기에 유난히 그 해에는 내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거대하고 거창한 크기의 고민을 많이 하곤 했다.


영미권 문화를 다루는 전공의 특성 상 영국와 미국에서 일어난 '인문학 정신의 퇴보'는 박터지는 과제와 발표, 레포트를 양산했고 수업 시간엔 늘 인문학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이며, 앞으로는 어떻게 흘러갈 지, 인문학적인 이상향은 불가능한 것인지, 이 현상을 이해하고 나아가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같은, 상당히 추상적인 생각들이 그 당시 대부분의 토론 주제였고, 친구들을 만나서도 이런 이야기는 이어졌다.


미국 친구로부터 미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 역시 자리를 잡은 기득권 층은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의견에 새삼 놀라고, 브렉시트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어리석은 선택이라 비판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한탄했다. 인문학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불안감, 배워온 것들과 지극히 반대되는 현실에 드는 회의감도 종종 몰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일이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마치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 마냥 거창하게 그런 큰 고민들을 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4년 전의 나를 떠올리면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론 그냥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일상과는 머나먼 이야기에 그렇게 열성적으로 공감하고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은,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 당시엔 공부가 곧 일이었기에 경제적인 부담이나, 사회적으로 달성해야하는 의무가 고스란히 이런 고민들과 일치했다. 공부를 하고, 좋은 학점을 받고, 장학금을 받는 일이 곧 나의 현실도 지탱하는 일이었기에 어떤 부담감도 없이 '평등, 자유, 개방'과 같은 단어들에 망설임없이 가치를 실었다. 그런 생각을 나누는 일이 재미있었고, 이런 가치가 현실에 온전하게 반영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마땅한 역할이라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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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행하고 있다는 '나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티셔츠.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 있는

부당한 인종차별을 피하려는 방어수단이라는 의견과,

중국인을 향한 또다른 차별과 혐오라는 의견이 맞서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장벽을 마주하는 나의 온도는 조금 달라졌다. 이전의 내가 아주 뜨거웠다면, 지금의 나는 미지근하다. 아니 어쩌면 약간은 차가운 쪽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책을 열기 전, 장벽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이 장벽은 물리적인 장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 장벽 뒤에 감춰진 존재의 실체는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고, '변화에 대한 불편함'일 수도 있고, '타자에 대해 느끼는 침입의 위협'일 수도 있었다. 가장 최악으론 '약자에게 향하는 감정의 배설'도 포함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 -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더 거세진 국내의 중국인 혐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동양인 혐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한 대구 경북을 봉쇄하라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굳이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뿐만이 아니라 사상 초유의 전염병 유행으로 물자와 인력이 감소하고, 세계 각국의 이동이 대다수 차단된 지금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과 이익에 예민해지고 있고 이 때문에 여러 형태의 마음의 장벽은 더 견고해지고 있다.


중국인 입국 금지 청원은 70만명을 웃돌았고, 대구 경북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접을 거부당하는 취업준비생이 있었고, 외국인 유입을 막으라는 목소리, 교민들을 향한 도를 넘은 비난 역시 강해지는 듯했다. 사회 시스템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장벽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러 형태로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여기에 차별을 두었다. 사회 여러 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러겹의 마음의 장벽을 쌓으며, 이전보다는 조금 더 쉽게 다른 이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해 된다. 개인의 안정이 위협 받는 상황에선, 지극히 당연히 장벽이 생긴다. 그만큼 개인에게서도, 사회에서도 다른 이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포용할 여유가 점점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코로나 19가 빚은 국내외의 상황을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 곳곳의 장벽들과 비교하는 건 언뜻 과도한 비약같지만, 사실 같은 근원적 뿌리에서 출발한다.내 공간, 우리의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본능이다. 거칠게 말하면 내 밥그릇 뺏기지 않으려는 자리 싸움과, 나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자들을 간편하게 차단하려는 마음이 세계 곳곳의 장벽을 이루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공간에 내가 아닌 타자를 들이는 일은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을 들여야하는 일인데,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바탕이 안정적이지 못하면 이 일은 자연스레 멀어진다.


팀 마샬이 《장벽의 시대》에서 다루는 장벽들은 대부분 여유가 없거나, 여유를 잃은 자들의 바람과 열망으로 인해 세워졌다. 자신의 공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본능은 끊임없이 장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충분한 보편적 복지, 경제적 여유, 사회적인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이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경 장벽을 없애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은 결코 가능할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같은 건, 신자유주의 경제 하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경제적인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결코 빈부격차에 따른 계층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이는 끊임없는 위계와 타자를 양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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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언론이 모두 사립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불균형하게 채워진 상황에서, 후자(소수의 기득권 세력)는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적인 담론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소수의 관점을 대변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반대 견해가 실제로 얼마나 인기 있는지 모호하게 만들 위험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점점 더 좌절하게 되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브렉시트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이런 이유로 2016년 6월 영국이 EU 탈퇴에 근소하게 찬성표를 던졌을 때 정치, 기업, 언론 계급은 큰 충격을 받았다. 덜 거만한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그들이 그동안 거대한 유권자들과 얼마나 유리되어있었는지를 깨달았다.

 

p.314


 

책 속에 언급된 소위 서구권으로 분류할 수 있는 국가들의 경우, 장벽을 만들어낸 원인의 대다수는 이민자로부터 생계를 위협받는 국내 노동자들이다. 미국과 멕시코를 가로지르는 가상의 장벽,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유럽의 난민 거부는 사실상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아닌, 그들보다 바로 아래 이민자로 인해 대체 가능성이 농후한 노동자 계층의 목소리가 컸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 그 외에 복잡한 원인들이 공존하지만,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의 결과를 대다수의 언론과 공식적인 채널들이 예상하지 못한 점을 미루어보면, 이민자들로부터 경제적 위협을 느끼는 자들의 목소리가 사회에서 어떻게 다뤄졌는지 알 수 있다.


노동자 계층은 사회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하게 펼치지 못하는 동시에 쏟아지는 이민자들로 인해 경제적 위협을 느낀다. 사회적, 경제적 격차로 인해 약자가 된 이들에겐 외부의 타자를 환영하며 맞이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격차가 당연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가장자리를 붙들고 있다. 도달할 수 없는 내부의 경제적, 사회적 장벽이 버젓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상부에 위치 않은 사람들에게 장벽은, 자연히 절박한 존재가 된다. 영국과 미국, 유럽의 문제만은 아니다. 당장 한국의 난민 문제, 코로나 19와 관련한 외국인 입국 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을 포용하는 일은 경제적인 비용을 발생시키고, 그 비용은 국민의 세금과 한국의 내부 자산에서 나온다. 흔쾌히 그 비용을 다 짊어질 테니 해외 유입을 무한정 허용하자는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 마샬이 지적한 '세계를 어디서나 보는 사람'과 '세계를 어딘가에서 보는 사람'의 차이는 흥미롭다. 전자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성을 보장 받는 경우가 많고, 후자는 이민자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절대비례가 아닐 지라도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서구 세계에서의 장벽은 해결되지 않은 내부의 경제, 사회적 장벽으로 인해 외부의 장벽이 생겨난 사례다.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여력이 없다면 국가 간의 장벽, 특히 이주 노동자나 난민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서구 사회에서 발생한 장벽과 다르게, 중국과 인도의 경우는 통합을 위해 분열을 조장한다. 중국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유지하고, 인도 역시 기득권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카스트 제도를 활용한다.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화가 이뤄진 서구의 사례에선 사회의 기득권이 진보적인 가치를 위해 외부에를 향한 개방을 택하고, 기득권이 아닌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면서 장벽이 생겨났지만, 인도와 중국은 장벽은 지극히 내부를 향한다.


소수의 이권을 지켜내기 위해, 그를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기 위해 사회 세력을 찢어두고 강약약강의 위계를 사회에 뿌리깊게 각인시킨다. 이 국가들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적 장벽은 서구에 비해 더 견고하다. 이들의 경제가 발달하고 안정되면, 이들 역시 내부의 장벽은 약화되고, 서구 사회처럼 외부 장벽의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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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간의 보편적인 형재애를 받아들일 때까지, 그리고 자원 경쟁이 없는 세계가 존재할 때까지, 우리는 장벽을 세운다. 언제나 그랬다. 우리는 동물이다. 멋지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고, 믿을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지만, 여전히 이 세계의 피조물이고,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p.345

 


대다수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로 오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 혹은 최소한 그 가치를 관용하고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새로 온 사람들이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동체에 합류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p.343


 

인간은 끊임없이 장벽을 만들고, 그 장벽을 낮추는 일은 적당한 타협과 인간의 긍정적 본성에 기대어야 한다는 마샬의 결론은 지극히 이상적이고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이다. 장벽을 대하는 데 있어 가장 현실적인 대응은 장벽을 세우고자 하는 원인을 면밀히 살피는 일, 그 불안감과 방어기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사회에서 감내할 수있는 다양성의 파이를 천천히 늘리고 변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일 밖에 없다. (이 마저도 사실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장벽에 대한 거부감은 낮추는 일은, 장벽을 세우지 않고도 기존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성과 외부 세력을 수용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여유에서 나온다. 동시에 개인적 차원으로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일전에 모든 사람들의 완벽한 평등을 이상적으로 꿈꾸던 나는 없다. 범세계시민, 아나키즘, 완벽한 부의 분배 같은 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현실적이지도 않다.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에 대한 답은 없다. 답이 있었다면 수많은 인류가 역사 속에서 수많은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면서 번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장벽의 완벽한 해체를 바라는 건, 그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낄 수있고 내가 아닌 타자의 자리에 '나'를 끼워 넣을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공감의 능력 위에 경제적, 사회적 여유가 뒷받침 된다면 장벽은 조금 낮아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린 사회적 상상력을 유지한 채로 최대한 '우리'에게 집중해야한다. 내가, 우리가 온전해야 남을, 그들을 위협이 아닌 동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종교가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두 영국인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사회를 원하는가에 대한 견해를 갖고 설명할 권리가 있다. 종교가 인간이 만든 법의 정치적인 장과 충돌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p.324


 

한 사회의 종교를 포함한, 경제적 안정성, 사회적 가치, 도덕성 등이 이민자 그룹과 충돌한다면, 그 사회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내부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그려나가야한다. 그리고 사회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천천히 다양성을 받아들여야한다. 이는 사회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존재하는 선에서 타자를 우리로 수용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돌보고 다른 이를 돌아볼 여유가 있어야만, 다른 이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내가 내 삶을 번듯이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 내가 안온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다른 이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세계 곳곳에 녹아든 장벽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순 없다고. 약간의 불편함을 타인의 고통과 동등하게 여기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타자의 존재 자체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줄다리기 양끝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분명히 헤아려야한다고.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는 이유는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줄다리기는 양 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 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쾌락독서》, 문유석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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