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종잡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인 녀석: 현대미술 [도서]

책 《태도가 작품이 될때》
글 입력 2020.04.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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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전공 수업 시간의 일이다. 교수님은 한창 진도를 나가던 도중 갑자기 책을 내려놓으시곤 말씀하셨다.

 


“얘들아, 지식은 중요한 게 아니다. 너희들이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건 나중에 잊어버릴 지식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다. 생각하는 능력이 결국 4년 동안 너희가 배워야 하는 덕목이야.”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이제 흐릿하지만, 아직도 가끔 교수님의 저 말씀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인문학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 바로 교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을 비껴보는 비판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말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태도가 작품이 되는,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엿보는 작가들을 만났던 순간이다.


현대 개념 미술을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 박보나 작가의 《태도가 작품이 될 때》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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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장르의 예술을 종잡을 수 없다고 정의한다. 그만큼 현대미술의 장르는 다양하고 형태는 무한하다. 심지어 전문가가 아닌 단순한 ‘애호가’에게 현대미술은, 언제나 거대한 바다와 같다.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고, 언제나 새롭다. 나 역시 현대미술을 좋아한다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현대미술은 어렵고 피곤하다.


가끔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작품도 많다. 하지만 그런데도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대의 개념 미술은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바라보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를 곳곳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글과 말로 세상을 비껴본다면, 현대미술은 시각을 포함한 오감으로 그 새로운 시선을 재현해낸다. 그렇기에 더욱 생생하게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학부 과정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후에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박보나 작가의 시선을 빌려, 작품을 통해 새로운 사고와 만나는 미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총 19명의 현대 예술가를 특성과 작품으로 구분해 그들의 작품이 전하는 새로운 생각을 친절히 해설하고 있다.


책의 제목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넘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새로운 시선,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참으로 마음에 드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의 종잡을 수 없음이 다차원적인 세계를 한층 깊게 바라보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표현이다.

 


아사다 아키라에 따르면, 편집증형 인간은 축적, 정주, 중심, 다수, 전체를 추구하며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에 분열증형 인간은 도박, 주변, 소수, 야성, 잡종의 성질에 가깝다. 나는 분열증형 인간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 나오는 작가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을 통해, 일반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 《태도가 작품이 될 때》 中


 

박보나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에 나오는 예술가들은 모두 분열증적 인간이다. 그들은 길들여지지 않고 안주하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항상 새롭다. 책이라는 가장 익숙한 매체로 이들의 생각을 엿보는 방식은 나 같은 편집증형 인간에겐 가뭄에 단비와 같은 분열증적 경험이다. (심지어 코로나로 발 묶인 요즘 시기엔 더더욱 단비와 같다)


손안에 들어오는 앙증맞은 크기 역시 실용성을 추구하는 편집증형 인간에겐 안성맞춤인 분량이다. 작품은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다른 이의 해석을 함께 곁들여 나의 생각과 비교해보는 것도 매력적인 일이다. 미술엔 나의 세계를 넓히는 경험이 있을 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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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킴, <제유법 Synecdoche>, 1993

 

 

가볍게 인상 깊었던 작가와 작품들을 일부 소개하자면, ‘차이와 다름’을 키워드로 소개된 바이런 킴과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를 꼽고 싶다. ‘단순한 색으로 미니멀하게 캔버스를 채우는 회화 작업을 주로 하는 한국계 미국 미술가’로 소개된 바이런 킴은 주변 사람들의 피부색을 캔버스에 작업해 <제유법>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방식인데,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예시다.


‘들’은 조국의 일부로써, 조국 전체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바이런 킴의 <제유법>에선 작가 주변 인물들의 피부색이 사람들 각자의 고유성을 상징한다. ‘모두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함께 살아간다.’라는 당연한 명제가, 각기 다른 색을 가졌음에도 한곳에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풍경을 통해 재현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아주 극미한 것과 무한한 것을 연결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는데, 피부색에서부터 세상이 뿜어져 나오는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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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 (완벽한 사랑)>, 1991

 

 

다름에 대해 또 다른 시선을 던지는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로스를 기리는 작품을 다수 작업했다. 일 분, 일 초까지 같은 시간을 보여주는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걸린 <“무제”(완벽한 사랑)>은 두 사람의 시간이 ‘동시에, 함께’ 흘러간다는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며, 연인과 함께 자고 일어나던 침대에서 혼자 일어난 아침 마주한,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사진으로 찍어 연인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해내기도 했다.


이외에도 책 속에 소개된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들은 사탕, 전구와 같이 다양한 소재로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양상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재미있는 지점은 여기에 대한 박보나 작가의 해석이었는데, 곤잘레스 토레스가 연인을 표현하는 작품의 재료가 모두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소재인 것이 인상 깊다는 평이다.

 


다이아몬드까지는 아니더라도 단단한 청동이나 콘크리트도 아닌, 시계와 작은 전구에 사탕이라니. 이들은 쉽게 닳거나 깨지는 재료들이기 때문에 전시 때마다 다시 고치거나 채워 넣어야 한다. ······ 완벽한 연인의 마음을 표현하려면 시곗바늘이 똑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시계는 매번 새로 맞춰진다. ······ 전구 작품도 그렇다. 쉽게 닳는 만큼 자주 갈아 끼워야 한다.


- 《태도가 작품이 될 때》 中


 

연인에 대한 감정은 깊고 소중하지만, 동시에 소중히 돌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바스러져 버린다. 오묘한 감정의 질감을 곤잘레스 토레스는 작품의 재료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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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 1991

 

 

이 작가의 작품의 흥미로운 이유는 또 있다. 그는 동성애자다. 그의 연인 로스 역시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다. 박보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앞서 소개한 이 작가의 작품들은 ‘(사회) 밖으로 밀려나고 낙인찍힌 동성애자들의 흔적을 가장 잘 보이는 공공장소 한가운데에 내놓는’ 행위이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들이 동성애자임을 알았다고 해서, 작품을 통해 공감했던 사랑에 대한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일까? 연인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다가 그들이 동성 커플이라는 사실에 흠칫 놀라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오히려 그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모두가 같은 사람이기에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지만,

사람이기에 같은 존재라고.

 

‘차이와 다름’이라는 키워드로 인상 깊었던 작가들만을 짧게 언급했지만, 이외에도 도끼처럼 머리를 내려찍는 작품들과 작가들이 가득하다. 현대미술의 아주 작은 단면이지만 현대미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책이 독자들을 현대미술의 종잡을 수 없음이 어쩔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오는 과정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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