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난겨울 푹 빠져있었던 달콤한 쇼트 브레드 이야기 [도서]

그 작고 조그만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글 입력 2020.04.0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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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어느 날, 연희동의 고즈넉한 오후를 걷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매력을 지닌 연희동은 교통이 좋지 않아 자주 오지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기분이 색달랐다. 마침 시간도 여유롭겠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독립서점 <유어 마인드>를 방문했다. <유어 마인드>는 1세대 독립서점으로, 2010년 홍대 서교동에서 문을 열고 2017년 4월부터 연희동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 2층에 있는 서점에 도착했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내부엔 사람이 꽤 있었다. 탁 트인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포근한 겨울 햇살에 기분이 맑아졌다.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는 재즈 음악과 함께 찬찬히 책을 구경했다. 그러던 중 잘 구워진 쿠키 색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1 스코틀랜드의 추위를 견디게 했던 달콤한 쇼트 브레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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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돌아온 날, 세 달 만에 몸무게를 쟀다. 대략 3kg가 쪄있었다.그 살은 쇼트 브레드를 끊자 곧 빠졌다.그러니까 정말 쇼트 브레드로 찌운 몸무게였다.살이 빠진 것이 어쩐지 아쉬웠다.수업을 들으며 작업을 하고, 작은 옥탑방에서 과자를 먹고,책을 읽는 것이 하는 일의 거의 전부였던 겨울이지나가버린 것이 실감이 났다."

 

- <쇼트브레드 다이어리> 中

  


책의 제목은 바로 <쇼트브레드 다이어리>. 표지에 있는 저 작은 쿠키가 쇼트 브레드인가? 궁금한 마음으로 표지를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다. 책은 작가님이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3개월간 미술 수업을 들으며 기록했던 이야기였다.

 

어떻게 이리도 사랑스러운 책을 만들었을까. 독립출판물의 매력이 한껏 녹아있는 책이었다. 하나하나 손으로 묶은 실제본 형식인 데다 아이보리색, 노란색 종이부터 때로는 투명종이까지. 사용된 종이의 종류도 다양했다. 글과 사진엔 스코틀랜드의 분위기가 가득 녹아있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사랑스러운 책이었다.

 

자리를 서성이며 한참을 고민했다. 얇은 소책자 형식의 책 치고는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릿속엔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계속 맴돌았다. 이미 쇼트 브레드 이야기에 푹 빠진 후였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쇼트 브레드 책 한 권과 또 다른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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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책장을 펼쳤다. 혹시나 종이가 닳을세라 조심조심 넘기며 사진을 보고 문장을 음미했다. 이런 책을 만났다는 게 기쁘고 감격스러웠고, 너무 멋져서 나중엔 질투가 날 정도였다.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잠에 들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가방 속에 품고 다니며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며 떠들어 댔다. 정말 멋지지 않냐고. 

 

 

 

#2 사실 우리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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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영민 작가님의 작업물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9월, 독립출판물 페어 <퍼블리셔스 테이블>에 방문했을 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부스를 찬찬히 둘러보던 중 앙증맞은 크기의 책을 발견했다. 주황색 사탕껍질이 있는 표지부터 매력적이었다. 제목은 <스몰 콜렉팅 북>. 말 그대로 작은 수집물을 스캔하여 모은 책이다.

 

내부를 펼쳐보니 지하철 티켓부터 설탕 봉투, 명함, 비행기 표, 나뭇잎까지 별의별 것이 모아져 있었다. 수집되고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저 흘러가버렸을 그런 것들. 누군가가 모은 사소한 수집물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정신이 없어 작가님의 이름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이 책도 영민 작가님의 책이었다. 계속 머릿속에 맴돌던 강렬한 책이었는데. 그간의 궁금증이 싹 풀렸다. 다시 연희동으로 갈 순 없었기에 인터넷으로 <스몰 콜렉팅 북> 두 권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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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언젠가 읽어보려고 메모장에 적어뒀던 책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 또한 영민 작가님의 책이었다. 얼른 읽어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결국 평일 오후, 알바가 끝나자마자 근처 서점으로 달려가 덥석 구매해 버렸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었지만 단 하루도 기다리기 싫었다.

 

서점에서 나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야금야금 읽어나갔다. 작가님의 사진과 일러스트, 글이 모여 만들어낸 분위기는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영민 작가님의 팬이 되었다.

  

 


 작가님의 블로그를 구경하던 중

직접 운영하시는 유튜브 계정을 알게 되었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3 제가 그 책을 얼마나 사랑했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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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앙증맞은 쇼트 브레드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은 정말 대단했다. 머릿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사실 작년부터 독립출판을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서 살아가고 때로는 여행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묶고 싶었다.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독립출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렇다면 내 책도 이렇게 얇은 진(zine; 소책자 형식의 독립출판물)으로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작가님의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나의 글과 사진을 파워포인트에 배열해 봤고, 비록 흑백이지만 집에서 인쇄해서 하나로 묶어봤다. 나중엔 이걸론 부족하다 싶어 책 편집에 사용하는 인디자인 프로그램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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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작가님의 책과 똑같이 실 제본을 하고 싶어서, 을지로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북바인딩 클래스도 들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재밌었기에 뿌듯한 마음으로 수업을 마쳤다. 오늘 배운 방법으로 내 책을 제본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내 책은 얇은 진 형식에 적합하지 않았다. 실어야 할 글과 사진이 생각보다 많아서 두께가 점점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는 노릇이었다. 큰맘 먹고 독립서점에서 진행되는 독립출판 4주 클래스에 등록했다.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홍대에 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으나 수업은 흥미로웠다. 내 글을 누군가에게 처음 첨삭 받았고 구성원들과 피드백도 주고받았다.

  

책의 프롤로그와 목차를 정하고 글을 썼고 사진도 골라 넣었다. 독립출판 전반을 배우고 홍보와 마케팅 방법도 알게 되었다. 아마 연희동에서 만난 쇼트 브레드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 간절하지 않았을 테고, 독립출판 클래스도 이렇게 빨리 듣지 않았을 거다.

 

지금도 책을 열심히 만드는 중이냐고 묻는다면, 아쉽게도 지금은 잠시 멈춘 상태다. 책으로 만들기엔 내 글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2년 전의 글이라 현재의 나와 많이 달라 괴리감이 들었고 문장을 고치면 고칠수록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진실과는 더욱 멀어졌다. 이조차도 클래스를 듣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겠지.


  

 

#4 지겨웠던 겨울도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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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이야기에 푹 빠져 겨울이 모두 지나버렸다. 벚꽃 피는 계절이 돌아왔으니 이젠 정말 봄이다.


춥고 쓸쓸한 스코틀랜드의 겨울을 달콤한 쇼트 브레드를 먹으며 이겨냈다는 영민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나는 작가님의 이야기로 지루했던 겨울을 견뎠다. 하고 싶었던 작은 소망을 행동에 옮겼고 직접 경험했다. 생각이 많아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내게 아주 유의미한 변화였다. 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일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다시 쇼트 브레드 이야기를 펼치게 된다면 종이 께에 배인 겨울 냄새를 맡게 될지도 모른다. 잘 아프지 않던 내가 유독 아팠고 쉽게 무기력해졌던 이번 겨울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말이다. 쉴 새 없는 고민에 머릿속이 갑갑했지만 해보고 싶은 걸 모두 해봤으니 후회도 없다. 싱숭생숭했던 겨울을 이젠 보내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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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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