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문학의 증언, 증언의 방향 -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도서]

글 입력 2020.04.0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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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왜, 어떻게 쓰이는가? 이 질문은 이야기(문학)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관련 있다. 무엇의 역할을 묻는 일은, 존재의의를 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증언자로서 작업에 참여하고 싶었다. … 그 100년의 증인이고자 했다. (350)

 

 

문학의 구조를 파헤치는 동시에 길을 안내하는 책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를 읽으며 문학이 가진 역할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어쩌면 본질은 비슷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저자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었다.

 

바로 ‘증언’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이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같은 책은 쓰기 방식 자체*가 이미 증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경우뿐 아니라 다른 작가가 쓴 다른 소설마저도, 결국엔 증언의 과정으로 태어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인터뷰를 통해 만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만 편집했다. 그는 책을 저술한다기보다는 기획하고 인터뷰하고 편집한다. (344)

 

 

 

증언하는 문학


 

왜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일까. 이유는, 나의 ‘아직 쓰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쓰기 욕망이 ‘이미 쓰인’ 이야기의 구조와 이야기가 쓰인 다양한 경위에서, 집요하게 어떤 공통점을 찾도록 추동했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는 소설을 써야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란, 어떤 책을 읽을 때 이야기 자체에 빠져 재미와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며’(384) 이야기에서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다시 쓴’ 해석자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게 전과는 다른 점일 테다. 그렇다고 저자 이현우가 일관된 관점을 갖고 각각의 이야기를 해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이 결과가 일단 만족스럽다. 한 번은 정리할 필요가 있는 생각이었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생텍쥐페리에게는 특히 그러했지만 어린이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다. 어머니는 사랑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구한다. 어느 날 어린 왕자의별에 씨앗으로 날아온 꽃나무는 그런 어머니를 닮았다. (200)

 

개정판을 낼 무렵의 괴테는 이미 30대 후반으로, 1786년부터 1788년 사이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고전주의자로 변모해가던 괴테다. 초판본을 내면서 ‘질풍노도’ 운동의 대표자로 떠오르게 되는 젊은 날의 괴테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 괴테이기도 하다. (229)

 

릴케는, 그리고 말테는 사람들이 죽으려고 오는 것 같은 파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 <말테의 수기>는 그러한 시적 여정의 이정표로 읽을 수 있다. (236)

 

헤세 자신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칼프를 다시 찾았을 때 고향의 거리 곳곳에서 살아 있다고 느낀 존재가 크눌프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크눌프와 고향을 하나로 느꼈다고 하므로 크눌프가 곧 칼프인 셈이다. (242)

 

(작가는) 거의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았고 이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꿈꿨지만 그는 프라하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적었다. … 카프카의 문학은 그러한 실패의 반복적인 기록처럼 보인다. (248)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 내가 타고난 모국어, 즉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한없이 다루기 편한 러시아어를 포기하고 내게는 두 번째 언어에 불과한 영어로 갈아타야 했다는 사실이다.” … 그것은 비극이되 소통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비극이다. 하지만 그 개인적 비극, 혹은 단독적 비극에 나보코프는 보편적 형식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다. 흔히 변태적 성욕을 다룬 작품으로 오해되는 그의 <롤리타>는 바로 그러한 형식화의 결과다. (325)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같은 문맥은, ‘어떤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로 읽혔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에 좋은, 아니 위대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는 어쩐지 달갑지 않은 이유가, 마치 좋은 이야기를 쓰려면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읽기뿐만 아니라 쓰기에도 도달하고 싶은 자에게 가혹한 교훈이다. 보통 좋은 이야기 뒤에 숨은 ‘어떤 삶’이란, 닮지 않고 싶은 성격이 대부분이라서. 조실부모하거나, 유랑민처럼 살거나, 떠나고 싶은 곳을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하거나.

 

한편으론 이런 점이, 문학의 역할을 굳이 ‘증언’이라는 무거운 단어로 설명해야 하느냔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이야기는 삶을 바탕으로 한다거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처럼 좀 더 보편적이고 쉬운 표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번엔 이 단어여야 할 것 같다. 인생의 한 부분이 된 이야기보다 인생 자체가 된 이야기가 더 절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증언해야만 하는 삶이란, 아무튼 쉽게 말하자면 가장 치명적인 것일 테니. 쓸 수밖에 없어서 쓰인 이야기는 그냥 어쩌다 쓰인 이야기보다 힘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후자의 이야기도 좋을 수는 있다. 그러나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태어난 이야기는 좋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톨스토이는 국가적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개인적 관심에만 골몰했던 사람들이 영웅적 행위를 통해 역사에 참여하려고 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유익한 일을 했다고 본다.

 

“역사적 사건에서 무엇보다 뚜렷한 교훈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을 뿐,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286, 287)

 

 

톨스토이의 관점에 동의하는 이유는 대의를 위한 문학이나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예술이, 무엇이 어디에 기여했다고 하는 말은 어쩌면 수많은 도착지 중 하나를 읽은 것뿐이 아닐까.


좋은 이야기의 도착지는 여러 곳일 수 있어도 시작점은 하나같다. 바로 가장 실제적 삶의 증언으로부터. 그러니 이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이냐는 질문은(지나온 삶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도),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과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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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의 방향


 

그나마 증언의 방향이 정해져있지 않다는 사실은, 내게 위로는 못 될지언정 하나의 가능성은 될 수 있을까. 증언하는 자로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맥락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결과는 ‘다시 만들어 낼’ 수는 있다는 가능성으로.

 

 

작가 뵐은 냉정한 현실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길도 제시한다. … 이 소설이 프레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뵐이 암울한 폐허 속에서 발견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255, 256)

 


전후에 회복을 말하는 일이 가능한가. 언젠가 나는 수많은 죽음 앞에 그래도 삶을 말하는 사람들이 근거 없는 긍정적인 태도를 애써 취하는 것이며, 그건 단지 비현실적인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의 이유를 첨예하게 파헤쳐서 날카롭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결론에 매혹되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얼마간 있던 그 시기가 지나자, 뵐 같은 태도를 가진 작가나 사람들이 더 위대해보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가 지금까지는 ‘더 아름다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러니 삶을 증언한다는 것 자체로도 심각한 일이지만 증언자(작가)의 태도로 결정되는 증언의 방향은 더 심각한 게 아닌가. 이야기의 결과가 결정될 것이기에.

 

일단 내게 쓰기의 욕망이 있다면 그것을 증언이라는 무겁고 구체적인 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이 하나의 수확, 그 증언을 어떻게든 끌고 가 끝을 낼 운전자를 지명하는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두 번째 수확이다. 운전자의 관점에 따라 도착할 곳은 얼마든지 달라질 것이다. 증언하는 행위 만큼 중요한 것은 방향, 곧 삶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

 

한 가지, 책 제목이 왜 ‘죽지 않기’인지 조금 궁금하다. 차라리 문학에 빠져 죽기였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것 같다,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래서 빠져 죽어도 좋다는 말이 아직은 더 와 닿는다. 그나마 근거로 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현실만큼 이야기가 실재한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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