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몸과 몸이 만날 때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3.31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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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몸이 만날 때



작년 가을, 서소문동의 미술관에서 봤던 영상을 선명히 기억한다. 몸의 움직임에 집중한 영상이었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거리 위에 선 여자들은 서로의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대며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쓰러져 누워있는 이를 천천히 세우고, 허리가 꺾인 채 일어나려는 이의 두 손을 잡아 무게를 함께 감당하며, 기꺼이 무릎 꿇고, 함께 누워 있다가, 다시 손을 잡으며, 그렇게 춤을 추었다. 불시에 찾아온 자동차의 클랙슨에 빠르게 도망갔다가도 자석처럼 다시 붙는 사람들. 영상을 보며 나는 조금 울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작품이 돌봄 노동자와 보살핌을 받는 노인의 모습을 담은 안나 비트의 영상물임을 알았다.


‘돌보지 않겠다(그게 자신을 돌보는 길이기 때문에)’는 각성한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때, 누군가의 돌봄으로 피와 살이 붙고 오롯이 설 수 있었던 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회가 대안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또 언젠가 핼쑥한 질병의 얼굴을 마주 본 날,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에 압도되어 슬픔도 화도 제대로 내보일 수 없었던 나는 질병과 돌봄이 여전히 무섭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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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첫 단행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이견 없이 찾아오는 질병에 대해, 돌보고 돌봄 받는 일에 대해, 늙어감에 대해 말한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질병과의 분투를 이어나가는 이와, 그 옆에서 못지않게 최선을 다하는 이들. 그들이 함께 사는 작지만 가장 큰 세계로의 여정에 모두를 초대하는 이 책은 몸과 몸이 만나는 이야기를 쓰고자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책이다.


돌봄과 아픔은 어떻게 치욕이 되었나

먼저 한국이라는 지형 위의 돌봄을 바라보자. 전희경 연구 활동가는 돌봄에게 씐 오명을 젠더부정의의 결과로 본다. 이제껏 돌봄은 지극히 여성의 역할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일’로 분류되는 것은,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연구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하는 ‘사적인 일’과 동시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독박이 된 돌봄은 여성 개인의 삶을 무참히 파괴하는 가혹한 일이 되었고, 돌봄이 주는 충만함과 위로 또한 흐릿해졌다.


또한 건강한 몸을 가진 독립적인 개인을 정상으로 상정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아프고 병드는 것은 거대한 두려움이 되었다. 생애주기에 맞는 표준화된 인생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아프거나, 아픈 자를 돌보느라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규칙에서의 추방과 같다. 건강은 일시적이며 질병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온다는 대전제 속에서, 이런 사회에 사는 일은 서서히 파멸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시 쓰는 세계 – 시민적 돌봄 사회

저자는 고역과 희생, 학대와 방치의 가능성에 점철된 돌봄을 시민의 과제로 확대한다. 먼저 건강하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관념을 지운 후, 취약하고 유한하기에 서로 의존하는 시민을 쓰는 것이다. ‘가족이라서’, ‘가족 같아서’가 아닌 가족을 넘어선 관계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곳을 그린다. 아픔과 질병이라는 공동의 운명 속에서 기꺼이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너무도 이상적으로 보이는 시민적 돌봄 사회를 우리에게 가까이 당기기 위해서는 추상화된 아픔과 돌봄의 구체적인 얼굴을 봐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과 의료접근권, 간병인 복지와 같은 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나중의 일이다.


그들이 언제 ‘죽고/죽이고’싶은 감정에 둘러싸였는지, 무엇이 그들을 실망하고 지치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그럼에도 서로를 보고 웃을 수 있었는지, 왜 그들은 이렇게 힘들어야만 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고 느껴야 한다. 비어있는 틈 사이에 살아있는 이야기를 넣으면, 돌봄은 더 이상 둘만의 고립된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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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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