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의 가면과 본질 [사람]

글 입력 2020.03.31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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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등하게 배분되는 나의 가면들


 

"과학 전공했다고?!"라며 믿겨지지 않는다며 자주 가는 바의 바텐더가 박장대소 했다. "응, 지구과학, 뭐 지질학 같은거"라고 내가 덧붙이자 더 크게 웃었다. '그렇게 크게 웃을정도로 내가 술만 좋아하는 이미지였던 것인가?' 난 어리둥절했다. 난 그냥 나의 여러 모습 중 와인 한잔씩 마시기를 좋아하는 특징만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렇게 누구나 다양한 페르소나(persona)가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이었다. 현재는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가면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가면의 형태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면, 즉 페르소나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직장 동료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친한 언니 앞에서, 단골 바의 바텐더, 초등학교 동창 앞에서 그 때 그 때 필요한 가면을 요술주머니에서 무한정 꺼낸다. 예를 들어, 나는 부모님 앞에서는 독서 좋아하는 무뚝뚝한 딸, 직장 동료 앞에서는 성실한 노력파이자 절주(節酒)의 대명사, 친한 언니 앞에서는 사려깊은 경청자이자 고민 해결사, 자주가는 바의 바텐더 앞에서는 칵테일과 와인 애호가다.


어떤 모습이 내 '진정한' 모습에 더 가깝고 어떤 것은 더 '가식적'인 것은 아니다. 다 나를 균등하게 배분된 나의 가면들, 페르소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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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로의 페르소나 전부 알 수 없다


 

성당을 참 열심히 다녔던 적이 있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오빠가 있었다. 그는 순둥순둥하고 미소만 지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 따랐다. 자기주장도 없어보이고 때로는 우유부단해보여서 매력이 별로 없어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오빠의 '성당 페르소나'만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알고보니 이 오빠가 놀랍게도 부동산 중개업자였다. 한번은 우연히 그 오빠가 일하던 부동산에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세입자에게 매물을 요목조목 설명하고, 법무인에게 전화하고, 계약서를 꼼꼼이 읽고 절차를 능숙히 진행하는 모습을 보니 깜짝 놀랐다.


그의 날카롭고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내가 이 오빠에 대해 알게모르게 무시해왔던것 같아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며 표정 관리 하느라 애먹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보여주고 싶은 가면만 쓴다


 

나는 그 오빠의 '성당 페르소나'만 보고 전체 성격을 단정지었던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렇게 우리가 상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대할 때다. "어떻게 말을 안할 수가 있어!"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내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며 섭섭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시간 친밀하게 지냈어도 자신의 일부 이상을 보여주긴 힘들다. 친해지면 착용하고 있는 가면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거꾸로 쓰기도 해본다. 그럼에도 다른 가면으로 (거의) 바꾸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아주 일부분 보고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쉽다. 특히 어른이 될수록 이런 경향이 커지는 것 같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척보면 척 알지~"라는 교만. 표정이나 말투만 봐도 그 사람이 자기와 맞는지 안맞는지 다 안다는 식의 말은 흔하게 들린다. 이는 과연 합리적인 판단일까?

 

 


가면보다 한 층 위,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더 큰 자아'


 

내가 갖는 수많은 페르소나 중에서 나의 본질이 있을까? 모든 가면이 균등하게 나의 일부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으며 이를 '더 큰 자아'이며 가면보다 한층 더 위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에크하르트 톨레, 마이클 싱어, 스티브 잡스 등의 철학자, 경영자, 영적 구루(guru), 등 그들이 쓴 책을 섭렵하면서 '더 큰 자아'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더 큰 자아'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페르소나와 다르며 우리를 엮어주고 연결시켜준다.


나와 너, 나와 지구, 나와 죽음,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보여주고 싶은 자아를 서로에게 은밀하게 공개한다. 그리고 뒤돌면 다른 가면을 꺼내 쓴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는 너무 다르고 이해를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 더 큰 자아를 보면 우리는 하나다. 나는 곧 너고, 우리는 곧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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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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