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외유내강'의 표본, 총보다 강한 실 [도서]

글 입력 2020.03.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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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필연적으로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고고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으로 강하고 썩지 않는 것들이 남았다. 실과 직물처럼 잘 썩는 물질들은 역사의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불에 들어가 있을 때도, 일상생활을 할 때도,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는 실과 맞닿아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혹은 딱히 관심이 없어서 실의 익숙함을 모르고 살았듯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실이 가진 강한 힘은 주목되지 않았다. 유하며 일상의 편안함을 주는 것보다, 강하고 파괴적인 것만이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오래된 편견 때문이었다.

 

이 책의 가치는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총보다 강한 실'이라는 책의 제목은 13개의 이야기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저자가 마지막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간결히 말해주고 있다. 작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관심 가지지 않았던 '실'과 '직물'의 역사를 독자로부터 끌어 들여와 그 가치를 일깨운다.


실상 삶에 도움을 주어 깊게 자리 잡아 온 건 실이지만, 역사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총과 철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한다. 우리에게 주류는 실과 직물이지만, 그것들은 역사에서 주류로 기록되지 않았다. '총보다 강한 실'을 통해 비주류라고 여겨지던 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실과 마찬가지로 외유내강의 힘을 가졌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밖의 것들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를 기록한 실


 

 

수백 년 동안 실과 직물을 만드는 노동은 여자들의 일로 여겨졌다. 아마도 일의 성격상 실기와 옷감 짜기가 아이 양육과 병행하기에 가장 쉬웠기 때문인 듯하다. 경험 많은 사람들은 집에서 한쪽 눈을 감고도 실을 잣고 옷감을 짜냈다. 그리고 실 잣기와 옷감 짜기는 중간에 방해를 받더라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머리말 '여자들의 일'_28P

 

 

실을 엮어 옷감을 짜는 기술을 발명한 여성들은 경제와 산업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것은 곧 그들의 정당한 자부심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당대 여성들의 표현 수단으로써 실은 곧 언어였고 소통의 통로였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정성스레 일조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남자들과는 다른 보수와 취급뿐이었다. 실과 연결되는 직물, 그 이면에는 여러 차례의 바늘을 꿰매던 여성들의 손과 이마의 땀방울이 서려 있다.

 

역사는 '실'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실'은 역사를 기록했다. 바늘을 든 여성 직조공, 그리고 후대의 여성 화가들이 한 땀 한 땀 제작한 역사는 곧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바늘은 붓이었고 실은 곧 물감이었다. 실은 그 어떤 것보다 섬세하고도 정확한 기술을 추구하며 시대의 기록에 앞장섰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역사적 산물이다.

 

 

바이유 태피스트리.PNG

'바이유 태피스트리'의 일부

 

 

'바이유 태피스트리'는 영국의 여성 직조공들이 11세기에 일어난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기를 그림으로 묘사해 나타낸 초대형 자수 작품이다. 비록 자기 나라의 패배를 묘사했지만, 정교한 기술과 섬세한 실의 표현이 돋보인다. 특히 11세기 유럽인들의 생활상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역사를 바꾼 중대한 사건을 묘사한 역사적 문헌이기에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프랑스 바이유 미술관에 소장됐던 작품은 2018년, 950년 만에 프랑스 영토를 벗어나 영국에서의 임대 전시 기회를 얻었다. 여러 가지 색실을 이용해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은 50개 정도의 장면을 삽화처럼 보여준다. 이처럼 '여성들의 일'이라 불렸던 직물 작업은 위대한 역사를 기록하며 시대를 증명하는 데 일조했다. 동시에 수준 높은 자수 기술 또한 증명해내었다.

 

사실 이 챕터를 읽으며 안타까움을 느끼던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여성들은 직물로부터 놀라움의 연속을 보여주었는데, 그 당대 사회는 마냥 여자들의 일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옷감을 짜는 일에 남자들이 관여하면 불운이 찾아온다던가, 말을 타고 나갔다가 실을 잣는 여자와 마주친다면 불길한 징조라느니, 사회는 실에 대한 여성의 기여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 바탕에는 애초에 여성에 대한 존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실과 여성은 평등하지 않은 인식 속에 끊임없이 갇혀 있었다.

 

불평등을 겪었던 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손에서 떠나질 않았던 실, 그것은 고스란히 전해져 여성 예술가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저급한 공예품 수준으로밖에 평가되지 않았던 '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아티스트가 있다. 강한 실로 전하던 예술가의 저항적 메시지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강한 실로 전하는 저항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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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ing at the Louvre, 1991


 

페이스 링골드는 1930년, 미국 뉴욕의 할렘가에서 태어나 평생을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저항한 아티스트다. 자신이 겪어왔던, 혹은 자신과 비슷한 다른 누군가가 겪어온 갈등 상황을 실을 통해 풀어낸 작가는 퀼트 그림에 이야기를 글로 써 덧붙이는 '스토리 퀼트'를 창조해냈다.

 

위 작품은 '루브르에서의 춤'으로, 백인과 남성 중심의 예술사를 상징하는 장소인 루브르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별을 당해왔던 그들이 속하지 못했던 장소에서의 춤을 추는 행위로 비판 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진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로 표현됐다.


캔버스 위의 퀼트 작업을 통해 실과 직물을 고급 미술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고정관념을 바꾼 그녀의 예술적 표현은 불평등한 역사 흐름의 일부분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고 많은 표현 재료 중 '실'과 '직물'을 택한 것도, 주류가 아니었던 실에 대한 역사와 예술가 본인이 겪어왔던 삶에서 행해져야 했을 '변화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말하기의 힘을 알고 있고, 퀼트가 예술이라는 형식을 앞질러 관람객들에게 보다 넓은 소통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는 여성들의 일상이 있고 그 일상을 이어가는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실은 총보다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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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무수한 역사를 써왔고, 앞으로도 우리 곁에 존재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갈 것이다. 책의 끝부분, 감사의 글에 적힌 저자의 말처럼 다른 어떤 물건보다 사람의 손에 많이 닿는데도 직물에 뭐가 들어가는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특히나 우리가 잘 모르고 관심 가지지 않았던 그것이 가치 있고 강한, '외유내강의 표본'임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실의 역사와 그 가치를 활자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일이다.

 

책 속의 13가지의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갖가지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불평등과 착취가 도사렸던 아픔까지, 실과 직물 그리고 그 역사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험난했지만 강하기도 했다.

 

모든 역사의 흐름에 함께 하면서 그것을 지켜보았던 '실', 끈질기고 강한 그 성질은 오래도록 잔잔하게 우리의 일상 어디서든지 자리 잡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전환된 시각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총보다 강한 실'을 추천한다.

 

 

"바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매력적인 책" <스펙테이터>

 

"아름다운 13개의 이야기. 글(text)과 직물(textile)의 즐거운 결합" <네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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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보다 강한 실

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지은이 :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옮긴이 : 안진이

 

분야 : 역사/세계사

 

출판사 :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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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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