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울고 절망하고 미적지근하게 웃음 짓는 삶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글 입력 2020.03.1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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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아침에 일이 끊겨버렸다.

 

잘 나가는 예술 영화 감독과 함께 일해왔던 프로듀서 찬실은 여느 날과 다름 없는 평범한 하루의 끝, 갑작스럽게 날벼락을 맞는다. 새로운 영화의 성공을 기대하는 자리의 긴 밤 좋아하는 이들과 술잔을 주고받던 순간 갑자기 모든게 무너진다. 바로 영화 감독이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만 것.


그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뒤바뀐다. 프로듀서로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너무도 즐거웠지만 자신이 함께하던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일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그리고 허탈감에 주저앉아버린다. 그 감독과, 그 주변인들과 함께 했을 때에만 제 일이 가치있었던 것이라니.


당장 돈 들어올 데가 마땅치 않으니 집도 외딴 곳으로 옮긴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댁에 세를 들어 산다. 그리고 친한 배우 소피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취직해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한 듯 살아가던 일상 속에서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로 인해서. 있던 복마저 다 잃어버린 자포자기의 상황에 찬실이는 소피네에서 만난 불어 선생님 영과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하숙집에서 자신을 장국영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남자와 만나기도 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주인공 찬실이의 인생에 생긴 작은 균열, 혹은 금, 혹은 틈일 수도 있고 어쩌면 숨구멍일 수도 있는 한 변화의 시점을 바라본다. 일에만 몰두해왔던 찬실이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춘다. 자신은 지금까지 영화 만드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이 일만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이 일만 파고들며 달려온게 잘 한 일이었을까? 난 정말 영화를 좋아했던 게 맞나? 지금까지 찬실의 삶을 달리게 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가 그녀 자신에게 빛을 잃는다.


그리고 연애에 눈을 돌렸다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바삐 움직였다가, 주저앉아 울다가를 반복한다. 마법같은 타이밍에 나타난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의 따듯한 품이 좋아 잠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이 역시 물거품 같은 꿈이었다. 영에게 거절당하고 나자 찬실은 문득 깨닫는다. 외로워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렇게 질풍노도의 힘든 시간을 지나며 찬실은 점점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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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이 있다. 장국영을 닮은 한 귀신. 그는 대체로 아비정전에서 맘보를 출 것 같은 장국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지만 귀신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허술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찬실의 마음을 아주 잘 안다. 찬실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안다. 찬실은 그와 대화하며 자신의 마음을 더 깊게 마주한다. 어쩌면 찬실은 장국영을 닮은 남자가 아니라,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처음 시작했던 그 시기의 자신과 대면한 채 대화를 해나가고 있었던 것일지도.


사실 이렇게 장국영을 오마주 한 장면은 굉장히 투박하면서도 웃겼다. 실제 장국영이야 무척 멋지겠지만 어딘가 어색한 분장을 한 장국영의 역. 어딘지 허술하고 멋없지만 이게 우리 삶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우린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늘 달콤하고 멋진 일만 일어나진 않는다. 로맨틱하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않다.


세상에 하나뿐이라 여겼던 내 꿈도, 내가 주인공인 삶의 무대도 가짜 장국영처럼 어딘가 부족한 맛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 영화 속에서 그 장국영은 진짜였다. 그가 찬실에게 전한 응원은 진심이었는걸.

 

그리고 영화의 전반,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집에서 잔잔하게 함께해온 주인집 할머니. 어떤 외풍에도 조용히 자신의 마당을 쓸고 한글 공부에만 전념하며 일상을 이겨갈 것 같은, 평범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나타낸다. 영화에서 말한 할머니의 모습에 동감한다.


할머니들은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 손길에 삶의 의미가 있다. 찬실이 힘들 때마다 주인집 할머니는 너무다 일상적인 말과 행동으로 그녀를 웃고 울게 만든다. 가물가물하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찬실이와 할머니가 함께 한글 연습을 할 때 써내려갔던 글귀. 사람도 꽃처럼 다시 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내용이었는데.

 

걱정 없이 금방 털고 일어나는 소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영, 오늘 하고싶은 것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할머니. 그리고 착한 찬실이. 정말 제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영화는 멀리가 아닌 가까이, 바로 내 곁에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반가움으로 담담한 위로를 전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흘러나왔던 노래가 귀에 맴돈다. 집도 없고, 사랑도 없고, 청춘은 가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 아이러니하고 자조적으로 웃게 되지만 어쩔까 이게 삶인 것을. 우린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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