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화 속의 문제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글 입력 2020.03.1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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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명으로 올림포스의 12신이 소집된 날. 모임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게 된 헤라와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르테미스.

 

과거 아름답고 도도하기로 유명했지만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에 질투의 화신으로 전락한 헤라, 사랑의 여신으로 불리며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실상은 매일 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욕정의 여신 아프로디테,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오리온을 깊이 사랑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가벼운 참견으로 시작된 세 여신의 대화는 점차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변해가며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는데...


본인의 능력을 꽃피우지 못하고 남편 뒤만 쫓는 한심한 여신이 되어버린 헤라, 진실한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색을 탐하는 데만 집중된 아프로디테, 본인의 욕망을 접어둔 채 처녀임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답답한 아르테미스. 서로를 비난하던 그들이 마주하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과연 비난의 칼날을 거둘 것인가?



올림포스의 12신들이 모이는 자리, 이런 자리가 영 어색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르테미스가 쭈뼛쭈뼛 등장한다. 그가 자리에 앉고 잠시 뒤, 자신을 치장하는 아프로디테가, 화가 잔뜩 난 헤라가 연달아 등장한다. 첫 등장부터가 완전히 다른 세 사람은 소소히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다가 나중에는 서로를 비난하고, 매도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답답해한다.


세 여신은 각자 완전히 다른 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자리들 가운데 놓인 이야기의 주제는 같다. 남자, 연애, 그리고 사랑. 도대체가 그게 다 뭐길래 그런 완고한 입장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왜 헤라는 결혼 전의 능력 있고 칭송받는 여신이 아니라 질투의 화신이 되었고, 왜 아프로디테는 ‘여신 망신 다 시킨다’는 소리나 듣는 가벼운 이미지가 되었고, 왜 아르테미스는 깝깝하고 독선적이며, 처녀신 이니 아름답지 않을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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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리스 로마신화의 일화들을 엮어 진행된다. 헤라가 바람둥이 신 제우스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 그 이후 남편의 바람 상대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고, 아프로디테와 헤파이토스, 아레스, 그리고 아도니스간에 얽힌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그런 유명한 이야기다. 아르테미스가 자신을 목욕하는 것을 훔쳐본 인간을 끔찍하게 죽인 이야기도, 오리온과의 슬픈 사랑 이야기도 그렇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그 익숙한 이야기들을 아주 조금, 다른 관점으로 풀어낸다. 어쩌면 지금껏 그렇게 보지 않아 왔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그 일들을 직접 겪은 여신들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결국은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륜의 원인은 남자에게 있음에도 결국 피해자인 여성들 사이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피해와 가해, 데이트 폭력과 칭찬을 빙자한 성희롱은 현실에서도, 현실을 닮은 신화 속에서도 만연하다. 여신들이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 놓듯이, 우리 역시 우리 주위의 이야기들을 그 누구도 아닌 그 당사자, 여성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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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였듯 세 사람의 입장은 각자 다른 곳에 있고 그들 사이의 논의는 몇 년 전부터,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이야기들과 멀지 않다. 사랑과 욕망, 약속, 그리고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각자의 목소리는 일견 타당하면서도 또한 일견 편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나도 중층적인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까? 그 논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극의 마지막에 헤라는 이전과 같이 제우스의 불륜 상대를 잡으러 달려 나가고, 아프로디테는 헤르메스 옆에 붙어 웃으며 아르테미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다. 방금 전까지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있었음에도 그렇다.


어쩌면 도돌이표 같아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이 마지막이 결국 논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 어떤 행동이 나타나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 셋 중 어느 한 사람의 입장이 옳아 선택하여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셋 아닌 다른 사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몫을 남긴다. 약속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고, 사랑도 왜곡될 수 있지만 그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요원해보이며 사랑과 욕망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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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욕망, 성애를 다루는 지점은 조금 아쉬운 부분으로 남기도 했다. 각자 다른 형식으로 세 여신은 사랑을 했다. 어떤 방식의 사랑인지, 그것이 중요하기도 하며 중간에 아프로디테가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해 짚어주기도 하였지만, 나아가 성애가 있는 지, 없는 지, 어떻게 구분되고 나뉘며 얼마나 많은 범주가 있는 지, 더 넓은 시각은 보여주지 못하고 사랑의 감정적 소모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던 아르테미스는 오리온과의 가슴 아픈 사랑을 회고한다.


극적인 재미에 대해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수많은 텍스트들과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은 중요하였고 간간히 존재하는 유머들이 웃음을 자아내긴 하였으나, 결국 한 시점의 토론 형식으로 보여지는 틀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다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우리가 살아가며 한 번 쯤은 고민하고 짚어보아야 할, 우리 바로 곁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대화의 좋은 시작이 되는 극이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페미니즘 입문극 -


일자 : 2020.02.29 ~ 2020.03.29

시간
평일 8시
주말 3시
월 쉼

장소 : 콘텐츠 그라운드

티켓가격

전석 40,000원

  

주최/주관

창작집단 LAS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90분



 


[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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