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실로 그려낸 이야기 : 총보다 강한 실 [도서]

글 입력 2020.03.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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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움직여왔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고고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으로 강하고 썩지 않는 것들이 남았다. 실과 직물처럼 잘 썩는 물질들은 역사의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남성이 절대 다수인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에 '도자기 시대'나 '아마 시대'가 아닌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역사 서적 근처에 가는 일이 드물다.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는 처음 보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외워야만 하는 숫자로 가득한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담은 흥미를 가지기 쉽지 않은 책이었고, 그 수업 또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한 탓인지 오랜 시간 역사는 나에게 어려운 주제였다.

 

이렇게 독서 편식을 하는 내가 역사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이유를 간단히 나열해보자면 책의 제목, 표지 디자인, 출판사 서평, 나의 전공 때문이다. 매력적인 제목과 표지 디자인에 이어 출판사 서평을 읽던 중 물음표가 등장했다. 철기, 청동기 시대라는 이름을 질리도록 들어오며, 여태 나는 왜 시대의 명칭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섬유를 다룬 수업과 복식사에 대한 수업은 듣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참으로 일관성 있게 역사를 피해서 살아왔다. 인간의 역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걸치고 있는 이 직물들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한 채 오직 보이는 것에만 치중해왔던 것이다. 보다 아름답고 감각적인 옷을 만들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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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실타래


 

책에는 총 13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차례에는 사진처럼 귀여운 그림과 함께 챕터별 제목이 적혀 있고 이는 마치 여러 개의 동화를 엮어 놓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 챕터 안에서도 몇 가지 소주제로 분류가 되어 있어서 읽기 편했다. 전반적으로 참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경우에는 한 번에 여러 챕터를 읽기에는 정보의 양이 생각 보다 많아서 끊어가며 읽어야 했다. 사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책이었지만 논문을 읽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쓰인 책임을 알 수 있었으며 새롭게 마주한 이야기들은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읽던 중 한나라와 흉노족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찾아보기도 했다.

 

13개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쓸 수 없겠지만 이 책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매력 있고 흥미로운 것에 틀림없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그래서 더 엉성히 알고 있는 그것들이 실과 직물이라는 것에 중심을 맞추어 이야기를 이어 나가니 두께가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을 때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2장에 나오는 이집트의 미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은 이의 무덤을 조사하며 대부분의 이들은 죽은 이의 몸을 감싸고 있던 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방해물인 것 마냥 기술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수의처럼 투탕카멘의 몸을 감싸며 신성함을 만들어 낸 그 린넨은 보존의 목적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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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Ringgold < The Picnic at Giverny >

 

 

 

실 그리고 여성주의 역사



실과 직물은 쉽게 썩는 물질이었다. 그리고 이를 다루는 것은 주로 여성들이었으므로 역사에 여성의 이름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럼 역사에서의 실과 직물이 제 위치를 찾는다면? 직물은 역사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비로소 기록되지 못한 여성의 이야기가 쓰일 것이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여성과 직물의 오래된 친족 관계는

축복인 동시에 불행이다"

 

 

물론 책 전체가 여성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책 제목에 걸맞게 성실히 직물과 실을 중심으로 한 신화, 언어, 예술, 기술, 패스트패션, 우주복, 스포츠 의류 등 아주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만큼 배울 것도 많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실과 직물을 다루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여성주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지난 역사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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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은 글을 쓰는 붓"


 

앞서 말한 것처럼 책을 읽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많이 생긴다. 아쉬운 점은 시각 자료 없이 온전히 글로만 구성된 책이기 때문에 옆에 노트북을 두고 수시로 이미지를 찾아봤어야 했다. 서술만으로는 머릿속에 형태를 그려내기에는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포함한 사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시각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책을 더 매끄럽게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이미지를 검색할 수 있는 전자 기기를 옆에 두고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처음 보는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 머릿속에 기분 좋게 가득 찬 기분이다. 끊임없이 사람의 손이 닿는 또는 피부에 항상 닿아 있는 그 직물에 대해 언제 이렇게 깊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익숙함에 쉽게 눈길을 주지 않았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그 이야기들은 타래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실을 천천히 풀어가며 바늘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된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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