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필사적인 사람들 [도서]

글 입력 2020.03.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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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1919~2013)의 대표작으로 흔히들 《황금 노트북》, 《다섯째 아이》, 《풀잎은 노래한다》와 같은 중장편 소설을 꼽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런던 스케치》라는 단편집이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5년 동안 쓴 열여덟 편의 짤막한 소설이 묶여 있는 이 책은 장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장편보다도 더 분명하게 레싱이 어떤 작가인지를 보여준다.
 
레싱은 짧게는 네다섯 장, 길어도 스무 장이 안 되는 단편에서도 전쟁과 인종 문제, 페미니즘, 결혼을 비롯한 각종 사회제도, 가족 공동체의 붕괴 등과 같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 글의 과감함과 거침없음,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한결같음에 나는 매번 놀란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혹은 말해야만 하는지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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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는 런던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들려준다. 만약 제목만 보고 매력적인 런던의 모습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코즈모폴리턴의 일상 같은 걸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해 바로 책장을 덮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집은 밝거나 쾌활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미 첫 이야기부터 마음이 서늘해진다.

〈줄리와 데비〉는 임신 후 가출해 도시의 한 공사장 창고에서 혼자 아이를 낳는 십 대 소녀 줄리의 이야기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차갑고 축축한 밤, 위태로운 줄리의 출산 장면, 줄리가 아이를 낳는 동안 공사장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 소녀의 몸에서 나온 후산물을 먹어치우는 떠돌이 개에 대한 묘사를 보고 있자면 내가 지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딜 봐도 구원의 기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삶을 목격했을 때, 단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싫어서 외면해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것들을 끝까지 참아내는 기분이랄까.
 
물론 그로테스크한 도시 괴담 같은 장면을 보여주는 게 《런던 스케치》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런던 스케치》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은 ‘필사적인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어디로도 가지 못하지만 있는 힘껏 지금 자리에서 버티는 사람들. 이 책에는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선택이 늘 옳지는 않고 항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나 어쨌든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삶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게 좋다. 결국 꼬이기만 하는 인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힘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까. 신의 자비가 쏟아져도 사람의 의지 한 톨이 없다면 땅 위의 일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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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에서 가장 필사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흙구덩이〉의 사라를 들겠다. 〈흙구덩이〉는 어느 날 오후 사라의 집에 이혼한 전 남편 제임스가 찾아오고, 그가 돌아간 뒤 사라가 내뱉는 독백과 상념들로 채워진다. 제임스는 수년 전 사라와는 외모나 기질 면에서 정반대인 로즈와 사랑에 빠져 사라를 떠났고, 이후 사라는 아이 둘을 홀로 키우며 살아왔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성장해 독립했고 사라는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녀는 조만간 회사를 그만두고 장기간 유럽 도보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예측할 수 있듯 사라는 제임스가 가정을 버린 후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사라의 표현대로 이제 그녀는 “그 모든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상관하지 않게 되는 것”, 고통 끝에 겨우 그 놀라운 “기적 같은 해방”을 얻었지만 제임스가 찾아온 뒤 그녀의 마음은 다시 들쑤셔진다. 어느새 로즈와의 사이에서 네 자녀를 낳은 제임스가 불쑥 나타나, 함께 여행을 가자고 애원한 것이다. 지난날에 대한 어떤 설명도 사과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떼를 쓰는 옛 남편. 사라는 연민과 슬픔과 짜증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다시 무너져내릴까? 제임스가 그녀를 떠나갔던 그때처럼?
 
사라는 제임스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로즈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집요하게 상상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자신의 아이들을 시켜 사라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할 것이고, 사라는 로즈와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기에 그때마다 로즈에게 정중히 응대할 것이다. 게다가 제임스, 한때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부양의 의무와 로즈의 또 다른 불륜 스캔들에 시달리느라  급속도로 늙어가는 그 가여운 옛사랑을 모른 척하지 못하고 결국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뒤에는, 완전히 뒤죽박죽 꼬여버린 나날들이 사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여러 생각은 사라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알려준다. 첫째로 그녀가 지금 간절하게 ‘탈출’을 원한다는 것.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상황에서 반드시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달려, 달려, 이 방에서 이 빌딩에서, 런던에서, 그래, 영국에서 도망쳐.”

달리고 달려 사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녀가 ‘원래 있던 자리’. 제임스가 사라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그녀가 유지하고 있던 평화로운 상태. 사라는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했던 옛날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녀는 최근까지 그래왔듯 로즈와 제임스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또 다른 깨달음은 로즈와 관련된다. 사라는 계속해서 로즈를 떠올리고 상상하는 동안 실은 로즈가 그렇게 강인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쟁 포로로 수용소에 갇혔다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전후 유럽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로즈.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생존 본능, 다시 굶주리고 싶지 않고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다. 그 절박함이 제임스를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사실은 사라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라는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녀는 로즈를 비롯해 그 누구의 행복도 깨뜨리고 싶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제 로즈를 ‘이해’하게 된다. 사라가 간절했듯 로즈 역시 간절했고 로즈가 간절했듯 지금 사라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지키는 데 있어서라면 더없이 간절하다. 필사적인 사람들.
 
살던 방식대로 살기 위해, 자신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마치 야반도주하듯 옷가지를 챙겨 집을 빠져나가는 사라를 보면서 누군가는 ‘꼭 저렇게까지?’ 할 수도 있다. 사라 스스로 말하고 있듯 제임스와의 만남에 어떤 위협적인 요소는 조금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자기보호가 과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의 대답은, ‘꼭 저렇게까지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꼭, 반드시, 절대로. 왜 아니겠는가? 이제야 겨우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비로소 그런 자유를 얻었는데. 그러니 온힘을 다해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남편이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져 떠나고, 그 이후로 두 자녀를 홀로 키우며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이, 더 이상 남편도 남편의 새 여자도 그들이 이룬 새 가정도 신경 쓰지 않게 됐다는 건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적이고 승리다. 진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던히 발을 굴리고, 어떤 때는 그저 가라앉아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그 깊은 ‘흙구덩이’의 시간이 선물해준 기적.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위대한 업적과 같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이 간신히 얻은 내면의 평화를 흔들려 한다면, 무엇이든 하는 게 맞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든, 맞서든, 숨든.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세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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