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사람]

글 입력 2020.03.07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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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넘어가는 달력, 시작과 끝 같은 것들에서 오는 변화를 민감하게 맞는 사람이다. 매번 같은 이름으로, 매년 비슷한 시기에 돌아오고 또 가는 것이 계절이며 또 달력의 숫자 같은 것들이겠지만, 지구가 생긴 뒤로 지금껏 단 한 번도 같은 날씨였던 적이 없었다는 노래 가사는 내가 다시 돌아올 그들을 오늘도 기다리는 이유가 되어준다.

그리하여 내게 계절이란 책이며 영화고, 음악이며 축제다. 언젠가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매년 계절에 대한 감상들과 나만의 감상법들이 달라졌다.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중이다. 계절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는 건, 아직 덜 자란, 덜 단단한 내가 세상에 지레 겁을 먹고 경계와 의심으로 마주하는 불안한 하루를 잠시나마 쉬어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 시간은 정확히 무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막연한 믿음과 희망으로 채워지는 시간이라고 불러보면 괜찮을 것 같다.

그리하여 또 계절이란 사람이고, 곧 향이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그 근처로 어떤 계절의 기운이 자연히 몰려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봄일 수도 있고, 여름일 수도 있으며, 가을, 겨울일 수도 있다. 두 계절의 중간 어디쯤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각자가 겪어온 다른 경험과 감상들로 만들어진, 어떤 풍경과 향과 기억이 묻어있는 계절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떠올려준다면 그 형태가 계절이면 좋겠다는 혼자만의 바람이 있다. 어떤 계절, 어떤 향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만의 색과 향이 짙은 사람이면 좋을 것 같다. 특히 내가 읽고 듣고 써내려가는 것들로부터 풍기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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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 피천득, 「오월」 중



겨울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와는 또 다른 이유로 5월을 기대한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오월이 되면 떠오르는 할일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피천득의 짧은 수필 「오월」을 읽고, 또 그걸 옮겨적는 일이다. 이 수필을 읽게 된 건, 즐겨듣던 음악이 이 수필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인 거라는 인터뷰를 읽고 나서다.


왠지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고등학교 3학년과 스무 살 즈음까지 가수 심규선의 ‘5월의 당신은’이라는 곡을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말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당시엔 곡에 이입한 나머지 한동안 5월에 태어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들로부터 이 글을 매년 찾게 된다. 대개 무언가에 애정을 갖게 되는 일은 현재나 미래보다 과거로부터 자주 온다. 스무 살의 기억과, 그다음 해 그러니까 5월생을 찾아다니는 일은 그만두었지만 여운은 놓지 못했던 스물한 살의 기억은 5월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되어준다. 물론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일이지만, 지나간 과거들이 그러하듯 그 시절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로써 떠오른다. 그런 표정을 앞으로 다시 지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현듯 밥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밥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 피천득, 「오월」 중


국수를 못 먹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찾아 먹는 것도 아니다. 특히 빨갛지도 않은 허여멀건한 국물이라면, 그 위에 올라간 것이 고작 호박과 파 몇 조각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앞서 말했듯 못 먹는 음식이라던가 싫어하는 음식은 아니다. 그저 자극적인 맛에 중독된 현대인의 시선과 입맛에 국수는 조금 지루하고 특색 없는 음식처럼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다. (고백하자면 자극적인 맛이 아닌 음식은 메뉴에서 배제하고 보는 사람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뜬금없이 국수에 대한 생각을 읊은 건, 5월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어주는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시간을 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다.

세어보면 고작 4년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의 가을까지. 다른 초등학교에서 4학년 때 전학을 왔고, 중학교 1학년 가을 즈음엔 내가 지금 사는 지역으로 또 전학을 갔다. 고작 4년을 지냈는데, 4년이 그 지역에서 살았던 14년 동안 기억의 대부분이다. 한 학년은 네 개의 반으로 이루어졌고, 후엔 그마저도 줄어 세 개의 반으로 지냈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대신해 「오월」의 일부를 인용한다.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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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 ‘미적지근한’ 음식 같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보다 국수는 많은 정성을 요하는 음식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국수를 만드는 한 남자가 면발을 뽑아내기 위해 반죽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온 힘을 반죽을 주무르는 팔에 쏟느라 벌개진 얼굴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반죽을 쳐댔다. 그렇게 한참을 꾹꾹 눌러대다 다 되었다는 듯 반죽을 봉지에 넣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렇게 국수를 뽑아내면 되는 줄 알았지만 그는 말했다.

“반죽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는 숙성시킨 반죽을 꺼내 밀대로 반죽을 밀고, 일정한 굵기로 한참을 썰었다. 그렇게 반죽부터 양념을 만들고 육수를 끓이는 과정까지, 한 대접의 국수가 나오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다큐멘터리를 본 뒤 이전에 어느 소설에서 국수의 길고 흰 면발이 ‘인연’, ‘절실한 연줄’로 비유된 것이 그제야 와 닿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국수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반죽하고 밀고 삶는 일은 고리타분하고 유난스레 여겨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한 대접의 국수에는 연줄에 대한 만드는 이의 절실함이 녹아 있다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도 그런 국수를 만들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해 지는 줄 모르고 모래성을 쌓던 일이, 운동장 끝부터 끝까지 겅중겅중 뛰다 넘어져 다리 전체가 쓸리던 일이 연줄을 반죽하는 일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지난 뒤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과 그때를 추억하다 보면 누구도 말은 않았지만, 우리가 반죽했던 것이 얼마나 기다란 연줄이었는지 조금씩 알게 되며 그동안을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피천득, 「오월」 중

 
올해의 3월은 그동안의 3월과는 다른 일상들로 채워질 3월이다. 새 학년, 새 학기, 새 친구 없이, 어떤 변화 없이 2월과 비슷한 3월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면 어디론가 정착하여 몰두하고 집중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3월은 3월이고 봄은 봄이다. 올해는 5월에 하던 일을 미리 하려 한다. 매년 그랬듯, 이름은 없는 안부와 함께 음악을 듣고 오월을 옮겨 적으며 지금 가고 있는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을 살아낼 것이다.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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