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 [영화]

영화 <당갈>
글 입력 2020.03.05 15:0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스포 주의

 

 


 

 

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일상, 드라마, 스릴러, 공포, 코미디, 액션, 스포츠, 판타지 등등. 영화 타이틀을 검색하면 꼭 붙어 나오는 분류 방식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직관적이지 못하다. 중심 소재나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밑에 나열된 줄거리까지 읽어야 대강 감이 잡힌다. 때로는 줄거리마저 명확하지 못하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를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영화의 어떤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카테고리라면 그 몫은 다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장르 구분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장르는 '부수는' 영화. 주인공이 부수는 대상은 실체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겪는 차별,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해진 약속과 규범 따위에 맞서는 이야기를 뜻한다. 주인공과 그의 주변인은 사람과 대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개념•생각과 싸우고 있다. 지금 소개할 <당갈>은 이 카테고리에 딱 걸맞은 영화다.



dangal.jpg

 

 

<당갈>은 실화를 각색한 영화로, 인도 여성이 결혼에 종속된 삶이 아닌 레슬러로서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기타 포갓(이하 기타)의 성장을 중심으로 3시간에 육박하는 긴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지루함을 느낄 타이밍에 기타의 생각과 태도가 바뀌는 주요 지점이 등장한다.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기타와 그의 동생 바비타가 처음 레슬링을 시작하고, 꿈으로 여기고, 기타가 홀로 서는 것까지. 이 포인트들이 생긴 계기와 발단, 그 과정에서 혹은 그 일 자체가 만든 변화에 대해 나누려 한다.


 


타인의 꿈, 대리인

 

기타의 아버지는 실력이 뛰어난 레슬러였다. 최종 목표는 금메달. 하지만 경제적인 부담으로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육성하는 일로 전향한다. 이런 현실에 굴복하여 나쁜 쪽으로 틀어졌을 수도 있다. 그가 방황의 길로 빠지지 않았던 것은 금메달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않은 덕분일까. 꿈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쭙잖은 말로 자신을 도발한 남자를 제압하며 여전함을 증명한다. 자신의 숙원을 대신 이뤄 줄 '아들'을 바라며.


뭐, 인생이 늘 그렇듯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 아들이 아니라 네 명의 딸이 생긴다. 와이프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그러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뒷바라지하는 게 여성의 본분이자 삶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사과할 일이 된다. 여자의 말에 괜찮다고 답한 남자지만 표정과 손짓은 그렇지 않다.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지, 여자가 아이를 밴 몸으로 다른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려나간 애씀을 인지하지 않는다. 관습이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침울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첫째 기타와 둘째 바비타의 주먹질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놀린 남자애들을 따끔하게 혼내주었다. 둘의 아버지는 그들의 재능을 보고 다시 꿈을 꾼다. 이 아이들이 자신의 대리인이 되어줄 거라는 꿈.


 

movie_image (2).jpg

 

 

아이들에게 레슬링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훈련받고, 맵거나 기름진 음식도 못 먹고, 머리도 시원하게 자르고, 하기 싫은 일투성인데 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해야 하나? 아버지를 위해서?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둘은 한껏 치장해서 친구의 결혼식을 몰래 간다. 그리고 현실을 마주한다. 억지로라도 레슬링을 택하지 않았다면 본인들도 따라야 했을 여성의 삶을.

 



나의 꿈, 탈출구


 

기타의 친구 결혼식, 모든 사람이 웃고 춤추며 논다. 딱 한 사람, 기타의 친구 빼고. 식물처럼 가만히 있다. 식장이 파하고 기타와 바비타, 친구가 모여 조잘거린다. 대화 주제는 '레슬링 하기 싫어'. 그들의 투정에 친구가 입을 연다.



여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요리와 청소를 가르치고, 가사를 하게 하잖아. 그러다 14살이 되면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넘겨주는 거야. 혼인시켜서 짐을 벗어버리지. 그리고는 아이를 낳고 기르게 만들어. 여자는 그게 다야.



레슬링이 아니었다면 이 결혼식이 기타의 결혼식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기타와 바비타는 훈련에 진심으로 임한다. 얼결에 쥔 다른 선택지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기타와 바비타가 레슬링에 열정을 보이면서, 아버지의 꿈은 그들 각자의 꿈이 된다.


각성 계기는 아주 간단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겪는 것. 레슬링이라는 꿈을 꿔야 하는 이유도 당연했다. 인생에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꿈, 선택지


 

쑥쑥 성장한 기타는 자신보다 체급이 큰 또래 남자아이들을 이기고, 지역대회에서도 이기고, 국가대표팀 소속이 된다. 그런데 대표팀에서 배우는 기술은 본인이 배웠던 기술과 달랐다. 코치는 원래 기술이 낡은 것이라고, 틀렸다고 꾸짖는다. 혼란스러워하던 기타는 국가대표는 배우는 게 다르겠거니 하며 코치를 따른다. 그리고 음식이며, 여가 공간이며, 놀 거리며, 온갖 자극이 풍부한 훈련소에 녹아든다. 길어진 머리와 성의 없는 연습, 엉터리 코치로 기타의 첫 국제 대회는 망한다. 완전히.


정신 차린 기타가 다시 아버지에게 연락하고, 제대로 훈련을 시작한다. 지역대회를 누비고 다니던 그때처럼. 결국, 두 번째 국제 대회의 결승전까지 오른 기타는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린다. 그도 그럴 것이 기타의 훈련, 식단, 경기전략과 분석까지 모든 면을 완벽히 커버해 주었다.


뛰어난 코치를 만난 것은 행운이지만 도리어 문제이기도 하다. 적절한 코치 덕에 경기가 잘 풀리니까 무작정 그를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는 방법만 날름날름 집어삼키면 스스로 경기를 판단할 수 없다. 기타도 이 과정을 겪는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며 결승전에서 만난 강한 상대를 버거워한다. 그러나 기타는 경기에 집중하고, 배운 것을 떠올리고, 금메달의 가치를 생각한다. 타인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되고 이제는 우리의 꿈이 되었음을.



너의 승리는 너만의 것이 아니고, 여성은 열등하다는 인도 문화에 대한 저항이며, 인도 여자아이들의 인권의 승리이다.



movie_image (1).jpg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기타와 바비타의 머리를 보며 낄낄거리던 사람들은 하나 없고, 모두 한마음으로 기타를 응원한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 이번 승리는 집안 허드렛일이 자신의 능력 전부라고 알고 있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여성은 집안일 말고 다른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너도 해보자. 기타는 승리한다. 다행을 넘어 감사한 일이다. 그의 승리를 지켜보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들이 꿈을 꾸기 시작했을 거니까.


 


힘을 이기는 힘


 

글로만 봐선 기타의 실력에 대단한 체급도 한몫할 것 같지만 사실 55kg을 간신히 넘는, 55kg 체급 턱걸이 선수다. 첫 국제 대회가 완패로 끝나고, 국가대표 코치가 기타의 체급을 낮추자고 지시해도 기타는 체급을 유지한다. 항상 자신보다 큰 존재를 넘어뜨리고 승리한 기타에게 납득이 되겠는가. 기타는 안다. 레슬링은 힘겨루기가 아님을. 기타의 첫 대회 때 그의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 경기를 보며 말한다. '작은 애가 이긴다'. 예언처럼 작은 쪽이 이겼다. 이처럼 영화는 줄기차게 말한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movie_image.jpg

 

 

기타는 자신보다 공격적이고 힘이 센 선수를 만나면 최대한 방어한다. 그리고 상대의 틈을 노린다. 방심을 틈타 공격하고, 상대는 당황하고, 기타가 페이스를 가져간다. 토끼와 거북이라고 생각해도 적절하겠다. 토끼는 자신의 힘(능력)에 도취한 나머지 방심하고, 그것을 기회 삼아 거북이가 이긴다. 촘촘한 차별 구조를 부수는 과정도 비슷할 것이다. 약자는 강자의 틈을 기다린다.


물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세상의 규범을 새로이 정의하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움직이고, 소리친다. 동시에 있는지도 몰랐던, 아주 깊은 곳에 묻힌 욕망을 하나둘 파내어 꿈을 키운다. 안 하고는 못 배길 만큼 크게. 레슬링은 한 라운드당 120초다. 고작 2분 안에서 상대는 적어도 한 번은 삐끗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얼마인가. 멸종하기 전까지는 무한대다. 그럼 강자는 아무리 적어도 몇 번, 어쩌면 수만 번 실수할 것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말에 따르면, 차별에 맞서는 것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셈이다.

 


[박윤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