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이 내 세계의 전부다. - 파수꾼 [영화]

글 입력 2020.03.0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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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태와 동윤은 마주본다.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그 둘이 서로를 보는 모습을 담지 않는다. 카메라가 고정된 곳은 동윤의 옆얼굴이다. 동윤의 옆얼굴을 보여주는 구도에 거울에 비친 기태의 모습이 조금 들어온다. 둘은 서로를 보고 있지만, 카메라에 비친 둘의 시선은 평행이다. 만나지 않는다.


기태는 그 때 너만 알아주면 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된다, 내 진짜를 봐주는 게 오롯이 너 하나여도 충분하다. 기태가 그런 말을 할 때조차 카메라는 둘의 시선이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태는 자살한다.


오해와 오인의 누적으로 관계가 허물어진다. <파수꾼>은 그 궤적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다. 오해와 오인의 빌미를 주로 제공하는 건 기태다. 그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만큼 자기 자존심도 중요하다. 백희는 누가 자기 머리를 만지는 게 싫다. 머리 좀 만지지 말라는 백희의 요청을 듣지만 기태가 백희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방식은 매번 머리를 만지면서다.


백희가 사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기태는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른 건 내 진심을 알아달라는 마음에서다. 동시에 왜 몰라주냐는 역정이다. 이만큼 고개 숙이며 들어왔으면 그에 걸맞는 호응이 돌아올 줄 알았을 거다. 백희는 기태가 처음 주먹을 휘두른 시점부터 기태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계가 작동하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기태는 계속 주먹을 휘두른다. 백희의 표정이나 말투는 자신이 바라던 그것이 아니다. 미안하다고, 이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도무지 말하지 못하겠다. 그게 기태의 자존심이다. 미안하다고 말하기엔 자기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기태가 주먹을 휘두른 또 다른 이유는 어쩔 줄 몰라서다. 보통 폭력을 행사하면 굴복했으니까. 그 동안 기태는 위계를 관계라고 해석했다. 높은 위계에 대한 굴종을 친밀감이라고 해석했다. 기태는 어리다.


동윤에게도 마찬가지다. 기태는 또 자존심을 부렸다. 동윤의 여자친구에 관한 소문을 구태여 그 자리에서 그렇게 발언해야 했을까. 동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한 것이라지만 실은 동윤을 이기고 싶은 마음에서다. 동윤은 백희와 ‘관계’를 성립한 거냐고 묻는데 기태는 그 물음을 훈계로 받아들인다. 조언이나 충고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기태는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는 듯 동윤의 이야기를 한다. 기태가 걱정인 양 동윤에게 했던 말은 네 사위나 신경 쓰고 너나 잘하라는 의식의 발로다.


<파수꾼>이 특별한 건 이 시기를 통과의례나 성장하기 전의 발판처럼 그리지 않아서다. 대부분의 성장서사에서 위기나 고통은 성장하려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무릎이 깨지고 이빨이 나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하고도 자전거를 타고 빙빙 돌며 서로에게 괜찮다는 다짐을 하는 그들에게 어떤 이입도 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고통은 성장을 동반하는 게 아니다. 고통은 상처를 남긴다. 마음에 새겨져 모난 자국을 남긴다. 생각할수록 아리고 때때로 환기돼 사람을 병들게 한다. 자기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때때로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살갗에 달라붙은 고통의 기억 때문이다. 그걸 성장이라고 호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통은 흉터다. 동윤과 백희에게 기태의 자살은 각성이나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없다. 평생 안고 가야할 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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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은 고통이 어떻게 새겨지는지 보여준다. 백희와 동윤에게 상처 준만큼 기태도 상처받았다. 처음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건 백희다. 기태 엄마의 부재를 알고 있던 백희는 의도적으로 기태 앞에서 엄마 이야기를 꺼낸다. 그 때 백희는 기태를 모욕하고 싶었다.


동윤 역시 자기 미성숙함을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기태에게 모질게 군다. 구체적 인과를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걸 기태 탓으로 돌린 동윤이었다. 기태는 너만 알아주면 된다고 말했지만 동윤은 기태에게 “친구라고 생각해본적 없다”고 말한다. “좆나게 역겹다”고 일갈한다. 기태에게 백희와 동윤은 자기 세계의 전부였다. 그들을 잃은 건 곧 세계의 상실이다. 기태가 자살한 건 참을 수 없이 마음이 아려서다.


<파수꾼>에서 성장하는 인물은 없다. 그 때의 경과를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는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둥의 철학이나 주제를 녹여낸 것도 아니다. 기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겐 학교와 친구가 세계의 전부였다. 끊임없이 자기 서열을 확인하며 열등감에 시달렸고 흠집난 관계를 메꾸려 전전긍긍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일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때 치열하게 고민했다. <파수꾼>이 인상적인 건 기태에게서, 백희에게서, 동윤에게서 나를 볼 수 있어서다. 그리고 어리고 미성숙해서 그렇다는 재단을 배제해서다.


마지막, 카메라가 기태와 동윤의 시선이 만나는 지점을 끝끝내 포착하지 않은 건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일 테다. 기태와 동윤은 서로가 특별하다고 믿었지만 결국 자기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해서 멀어진다. 기태와 동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타인이 특별하다고 믿은 적 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배신당했다. 당신을 안다고 생각하여 관계 맺지만 실은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은 부분 혹은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본 것일지 모른다. 관계는 배신으로 수렴되고, 따지고 보면 내 탓도 있다. 사실 나는 너를 잘 몰랐다. 너에게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봤다. 결국 나는 너를 제대로 알지 못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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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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